“종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종이는 아이들 공부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구이고요. 그것을 만드는 일이 어찌 부끄럽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좔좔 외우라 독려해대는 《사서삼경》도, 종이가 없다면 어찌 읽을 수 있겠는지요?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 대나무에 글씨를 새긴 죽간(竹簡)이라도 들고 다니라는 겁니까?”
“양반 상놈 구분 안 되는 행색으로 유민들과 뒤섞여 막일 따위를 하면서, 중부학당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엇이 그리 당당하단 말입니까?”
“행색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지난 시화전엔 무명옷 차림이었고, 오늘은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하나, 저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요! 박꽃은 그 행색은 초라하나 한 덩이의 박으로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에 충분하고, 연꽃은 비록 화려하나, 그 열매는 대추나 밤만 못한 법입니다!”
--- p.61~62
그림이 완성될수록 휘음당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다. 시화전을 통해, 사임당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알고 방심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사임당의 화재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휘음당은 불안과 초조로 잔뜩 긴장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사임당을 지켜본다.
드디어 묵포도도(墨葡萄圖)가 완성됐다. 사임당은 호흡을 고르며 붓을 놓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치마의 주인을 바라본다.
“흉함과 아름다움 사이엔 경계가 없다 생각합니다. 이 치마를 가져가시면 곤경을 모면하실 겁니다.”
--- p.68
“운평사 고려지를 꼭 재현하시오. 그리하여 이 종이에 그대의 그림을 그리시오! 나는 조정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오.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열심히 일한 백성이 수고를 인정받고, 굶주리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바른 세상을 만들 것이오. 그러자면 그대가 꼭 성공해야 하오. 제대로 된 고려지를 만들어, 내가 그려갈 그림의 토대를 만들어주시오!”
바위처럼 단단하고, 횃불처럼 뜨거운 말에 사임당의 가슴이 일렁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내인가. 가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연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끝끝내 외면해야 했던 님이지만, 괜찮다. 가질 수 없어도, 만질 수 없어도, 끝끝내 그리워하며 산다 한들, 괜찮다. 사임당은 결코 뱉어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삭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 p.86
편지를 읽던 사임당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이토록 눈물이 나는 이유가 뭘까. 그림을 되찾았는데, 좋아서 방방 뛰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듯 심장이 찢어지게 서러운 이유는 뭘까. 그녀는 휘건에 눈물을 적시며 편지를 읽어나간다.
感恩懷舊 其心則同
物得所歸 妙矣天機
은혜를 생각하고 옛일을 추억하니 그 마음이 한가지라.
그림이 돌아갈 자리를 얻는 것이 오묘하도다, 하늘의 뜻이여.
--- p.241
“폭풍 속에 들어앉은, 고요함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두렵지 않으냐?”
중종이 삐딱한 눈으로 본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며, 소나기도 온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하였습니다.”
사임당은 침착하다. 살다 보니 얻어지는 게 있다.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는 것.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든 순간도 지나가고, 기쁨에 겨워하던 순간도 지나간다.
--- p.272
“큰 바다로 나가면 다른 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임인년 5월까지 천축국 고아라는 곳에 당도해서 방제각이라는 색목인을 만나세요. 먼 이국으로 보내줄 겁니다.”
“날더러 이대로 떠나라는 것이오? 그럴 수 없소.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오.”
“사셔야 합니다. 절 위해, 그리해주십시오.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선택해주십시오.”
“사임당…….”
“우리가 떨어져 있다 한들 그것은 이별이 아닙니다! 육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영혼은 함께할 것입니다! 두들겨 얇게 편 금박처럼요! 마음의 길이 끊기는 일은 결코 없단 말입니다.
---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