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는 1853년 3월 30일에 출생하여 1890년 7월 29일에 사망한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약 860점의 유화를 포함하여 2,10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 자화상, 풍경, 정물,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밀밭과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상징적인 색상과 극적이고 충동적이며 표현적인 방식이 특징이다. 그는 생애 동안 단지 한 작품만을 팔았고 가난과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가 37세에 자살하였다. 광인과 인생의 실패자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천재로 평가 받게 되었다. 그의 광범위한 상업적, 대중적 성공은 20세기 초기 독일의 표현주의자들과 야수파가 그의 작품을 사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의 명성은 20세기 동안 꾸준히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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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필 화랑
1869년 7월, 빈센트의 삼촌인 “센트”는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의 화상 일을 그에게 구해 주었다. 그 후 1873년에 빈센트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았고, 스톡웰의 핵포드 거리 87번가에 하숙집을 얻었다. 그는 일에서 성공하였고 이 시절은 빈센트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당시 그는 하숙집 주인의 딸인 ‘유제니 로이어 ’에게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다가 그녀에게 거절당했는데, 이미 그녀는 이전 하숙인과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였다. 빈센트는 절망하였고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구필화랑 파리 지점으로 그의 발령을 주선하였지만 미술을 돈벌이에만 이용하는 현실에 분노하였고 결국 그는 구필 화랑에서 해고되었다.
3) 종교의 갈망과 보리나쥬
그 후, 그는 램스게이트에 있는 작은 기숙학교에 무보수 교사로 취직되어 영국으로 갔다가, 감리교 목사의 조수가 되기 위하여 그 일을 그만 두었다. 한편 그의 부모는 에텐으로 이사하였으며, 1876년 크리스마스 때 빈센트는 집으로 돌아가 6개월 간 머무르면서 도르드레흐트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낙서를 하거나 영어,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더 종교에 빠져 들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전도사가 되려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1877년에 그의 가족은 빈센트가 삼촌의 집에 머물면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그를 암스텔담으로 보냈다. 빈센트는 그의 삼촌이자 존경 받는 신학자인 ‘요하네스 스트리커’의 집에서 입학시험을 준비하였으나 시험에 낙방하여 1878년 7월에 삼촌 집을 떠났다. 1879년 1월, 그는 벨기에 보리나쥬의 탄광 마을인 ‘프티 바스메스’에서 전도사 직업을 얻었다. 가난한 신도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빈센트는 편안한 숙소를 포기하고 짚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의 지저분한 생활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 하였다. 그 후 그는 브뤼셀로 갔다가 그의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돌아 갔다. 1880년 3월까지 집에서 머물다가 보리나쥬의 퀘스메스로 돌아와 10월까지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풍경을 그려 당시 생활 모습을 기록하였다.
4) 키 보스 스트리커
1881년 4월, 빈센트는 그의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해 8월에 얼마 전 미망인이 된 사촌인 ‘키 보스 스트리커 (Kee Vos-Stricker)’를 만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언니인 빌라미나와 요하네스 스트리커의 딸이었다. ‘키’는 빈센트보다 7년 연상이었고 여덟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빈센트는 그녀에게 청혼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안돼, 그게 아니라 절대로”라고 말하면서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키가 암스텔담으로 돌아간 후, 빈센트는 그녀를 만나러 암스텔담으로 갔으나 그녀는 빈센트를 만나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그는 “그녀를 볼 때까지 램프에서 이 손을 빼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왼쪽 손을 램프 불에 넣기까지 하였다. 키의 아버지는 딸이 거절하였고 빈센트가 자신 조차도 부양할 능력이 없으므로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빈센트는 암스텔담에서 헤이그로 가서 마우베에게 자신을 학생으로 받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우베는 빈센트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하여 그를 집으로 데려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해 크리스마스에 빈센트가 교회에 가는 것을 거절하여 아버지와 다툰 후 1882년 1월 다시 헤이그로 갔다. 마우베는 그에게 유화로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었고 작업실을 만들도록 돈도 빌려주었다.
5) 시엔 후닉
1882년 1월 말, 빈센트는 다섯 살의 딸이 있고 임신 중인 알코올 중독자이자 매춘부인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후닉(Clasina Maria “Sien” Hoornik)”을 만났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죽은 두 아이를 낳았지만 빈센트는 이 사실을 몰랐고, 7월 2일에 그녀는 아들인 빌렘을 낳았다. 빈센트의 아버지가 그들의 관계를 알았을 때 그는 시엔과 그녀의 두 아이를 포기하라고 빈센트에게 압력을 넣었다. 빈센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지만 1883년 말 그는 시엔과 아이들을 떠났다. 그 후 시엔은 자신의 딸을 어머니에게 주었고 아들 빌렘은 오빠에게 주었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북부의 드렌테 지역으로 이사하였고 그 해 12월에 외로움에 못 이겨 브라반트 북쪽의 누에넨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6) 누에넨과 마고 베게만
누에넨에서, 빈센트는 그림과 데생에 전념하였고, 몇 점의 ‘베짜는 사람’과 그들의 시골 집을 스케치와 유화로 그렸다. 1884년 말, 이웃집에 살던 빈센트보다 12년 연상인 마고 베게만 (Margot Begemann)은 종종 빈센트가 그림을 그릴 때 함께 하였다. 그녀는 빈센트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도 약속하였지만 두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결과, 베게만은 자살하려고 스트리크닌을 과다 복용했으나, 빈센트가 그녀를 인근 병원으로 신속히 옮겨 살아났다. 1885년 5월,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 (Potato Eaters)이라는 최초의 주요 작품을 완성하였고 그 해 8월에 그의 작품은 헤이그의 물감 판매점인 러스(Leurs)에 최초로 전시되었다. 누에넨에서 머무는 2년 동안, 빈센트는 많은 데생과 수채화 그리고 거의 2백 점에 가까운 유화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그림은 어두운 갈색을 주로 사용하여 음울한 느낌을 가지며 그의 후기 작품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빈센트는 그의 동생인 테오가 파리에서 자신의 그림을 파는데 노력하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테오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형의 그림들이 너무 어두워 현재 유행하고 있는 밝은 느낌의 그림들과 맞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7) 앤트워프
1885년 11월에 빈센트는 앤트워프로 이사하여 이마제 거리에 있는 물감 판매가게 위층에 작은 방을 얻었다. 그는 테오가 보낸 돈으로 미술재료와 모델을 구하였으며, 가난 속에 어렵게 생활하였다. 앤트워프에서 그는 색상 이론의 연구에 전념하였고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피터 폴 루벤스’의 작품들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림에 암적색, 코발트 블루, 에머랄드 그린 등의 색상을 추가하였고, 부둣가에서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를 샀는데 그 스타일은 훗날 그의 작품 일부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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