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예상보다 추워지는데, 이러다가 등사 잉크가 얼어붙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윤세주가 걱정을 하자,
“등사가 잘 안 되면 정말로 큰일인데…!”
하고 뒤에 오던 윤치형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들은 오나가나 독립 선언서 생각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까짓 거 안 되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하면 될 기인데, 그런 걱정은 뭐할라꼬 해쌌노?”
이것은 윤세주와 함께 부북면 사무소로 등사기를 훔치러 갔던 이장수의 말이었다.
“그래, 늬 말이 맞다. 참말로 장수다운 말이로구나!”
박만수가 농담조로 대꾸를 하자, 저쪽에서 설인길이 그 말을 받는다.
“그래도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기이다!”
“추화산에 있는 성황사가 아무리 절해고도처럼 호젓한 곳이라 해도 산새들이 불빛을 물고 왜놈들의 경찰서가 있는 성내 쪽으로 날아가면 우찌할 기이고?”
또 누군가가 우스꽝스럽게 이렇게 한마디 보태자, 이장수가 그 말이 땅에 떨어질세라 낼름 받는다.
“그라모 새총으로 잡아서 불에 얼른 구워 묵어 삐리지, 머!”
이장수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모두들 큰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쿡쿡거리며 웃는다. ---「추화산성(推火山城)」중에서
“그렇게도 많은 돈을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다 나누어 주게요?”
하루 일손을 놓고 읍내 만세운동에 나가라고 하면 그렇잖아도 바깥바람을 못 쐬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장정들이라, 물어보나 마나 모두들 제 세상을 만난 듯 뛸 듯이 기뻐 날뛸 게 뻔하였다. 게다가 소꼴 머슴의 일 년 치 새경과 맞먹는 나락 한 가마니 값에 가까운 큰돈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라니, 갑작스럽게 이 무슨 조처인가? 김 서방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성내까지 가고 오는 뱃삯에다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왜놈 순사들과 헌병들한테 쫓겨서 차를 타고 먼 곳으로 피신해야 할 일도 생길 수 있고, 상처를 입고 인근의 민가에 숨어들어가 신세를 지게 될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걸세. 그리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멀리 도망가 은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왜놈들을 뒤에 달고 동산리 쪽으로 도망쳐 오는 위험천만한 일이 있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도 단단히 일러 주도록 하게!”
비장한 얼굴로 이르는 중산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 서방은 그제서야 한술 더 뜨며 자신의 생각까지 보태는 것이다.
“그라고 왜놈들한테 붙잡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주인집 몰래 귀경하러 나왔다가 만세운동에 휩쓸리게 된 기이라는 말 외에는 입을 딱 봉해 버리라는 말도 단단히 일러 듣겨야 되지 않겠습니껴?”
“그야 여부가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빠뜨린 것이 있으면 그것도 자네가 다 알아서 부가하여 조처를 해 주면 고맙겠네!”
그러면서 중산은 아까 한 사장한테서 잔돈으로 바꾸었던 20원 전액을 김 서방의 손에 쥐여 준다. ---「대륙풍(大陸風)」중에서
“자네 소원은 혹시 지금 저쪽 행랑 수청방에 차려진 신방에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보쌈을 해 달라는 기이 아닌가?”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는 신랑 다루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바깥마당의 사정과 신부가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는 행랑 수청방의 안팎 사정을 곳곳에 풀어놓은 부하 거지들의 보고를 통하여 훤히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소! 때가 늦기 전에 혼자 있는 신부를 술단지처럼 이불에 둘둘 말아 가지고 데리고 와 달라는 기이 내 요구 조건이요! 그러면 나도 살인 같은 큰 죄를 짓는 일이 앙이라면 당신네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소!”
“신부를 여기까지 보쌈을 해 오는 일은 남의 눈에 들키기 쉬우니까 어렵겠고,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어떻게 말이요?”
“남들이 안 볼 때 자네가 진짜 신랑인 것처럼 해 가지고 신방으로 들어가서 신부와 합방을 먼저 해 버리면 어떻겠나? 지금 새신랑이 바깥마당에서 술에 취해 가지고 인사불성이 다 되었다고 하니 그 방법이 뒤탈도 없고, 자네한테도 청지기 딸하고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꿈같은 신혼 첫날밤을 보내는 셈이니 그보다 더 뜻깊은 일이 어디 있겠나?” ---「천둥소리」중에서
중산은 부지불식간에 박철 사교의 존재를 떠올리며 기가 막힌 나머지 그런 경황 속에서도 실소를 금치 못하고 격앙한다. 부친이 유림단의 독립 의거에 가담한 혐의로 의성경찰서에 구금되고, 갑환이와 강학당의 두 선생들까지 왜놈 헌병들한테 끌려간 마당에 난데없이 또 격문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란 말인가?
왜놈들을 대적하기도 버거운데 동족으로부터, 그것도 노선은 서로 달라도 다 같이 독립운동에 힘쓰는 동지나 다름없는 사람으로부터 속수무책으로 협공까지 당하는 형편이 되고 보니, 중산은 그동안 눌러 참고 있었던 박철 사교에 대한 반감이 전에 없이 불끈 북받쳐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담담한 어조로 서 서방에게 묻는다.
“지금 용화당 할머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어둠 깊은 밤」중에서
청관 스님은 아무래도 수상쩍다는 생각에 청년의 목을 휘감은 팔뚝에 힘을 가하면서 골목 옆의 가겟집 널빤지 벽 쪽으로 거세게 몰아붙인다.
“시님, 시님! 저는 시님을 진짜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저를 못 믿고 이러십니까?”
“네놈이 나를 안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말하라!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이었는지를 당장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다!”
청관 스님은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전혀 기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당당하게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드는 청년의 반응을 주시하며 귀를 세운다.
“시님께서는 의용승군으로 활약하시는 동래 범어사의 청관 시님이시며, 저쪽 정미소 뒷마당에 있는 우리 대종교 구포 시교당으로 백산 사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십니까?”
“아니, 나는 네놈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는데, 동래 객사에서 상전의 시종 노릇이나 하고 지내던 네놈이 그런 것은 어찌 안단 말이냐?”
청관 스님은 자신의 정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청년의 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의 말대로 학생운동을 하는 청암의 단순한 시종이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암약하는 왜놈 첩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싶은 것이다.
---「떠오르는 지평선(地平線)」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