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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길

외교의 길

: 평화를 향한 여정

[ 양장 ]
한승주 | 올림 | 2017년 06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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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6월 0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15쪽 | 730g | 152*225*30mm
ISBN13 9788993027907
ISBN10 899302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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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한승주
194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미국 뉴햄프셔대에서 정치학 석사,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대학에서 약 8년, 귀국 이후 30년 가까이 고려대에서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외무부 장관으로 정책을 만들고 현장을 지휘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주미 대사로 격동의 외교무대에서 직접 선수로 뛰기도 했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도 외교에 종사하고 있으니 반세기 경력의 ‘교수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에 몸담고 있지 않은 시절에도 늘 민간외교 무대의 현장에 있었다. 교수 시절 다양한 국제 교류를 통해 쌓아둔 인맥은 훗날 장관으로서 공식 외교 무대에서 활동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민간인 시절에는 키프로스 유엔사무총장 특별대표, 서울국제포럼 회장, 동아시아비전그룹(EAVG) 의장, 삼각위원회 아시아태평양지역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최근(2017년)까지 한독통일정책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 한미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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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아홉 살 때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고, 두 번째는 195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에 2개월간 연수를 다녀온 것이고, 세 번째는 1960년 4·19혁명에 참여한 것이다. --- p.17

9월 27일 밤에는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서울 근교까지 들어와 동대문 밖 창신동 일대에 포탄을 쏘아 댔다. 그 와중에 총알만 한 파편이 날아와 내가 입고 있던 바지를 뚫고 오른쪽 엉덩이에 박혔다. 부모님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나를 업고 포격을 피하여 부친의 친구가 살고 계신 의정부 마전리 쪽으로 향했다. 창동쯤에서 북한군이 서울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더니 배낭에서 자기 어머니가 주었다는 명주천을 꺼내 내 상처 주변을 묶어 지혈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그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다. --- p.20

맨손의 시위대에게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쏜 것이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 다른 사람 밑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나도 얼른 엎드렸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긴박한 순간, 나의 스무 살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잠시 후 나는 낮은 포복 자세로 골목길로 들어가 진명여고 담장을 넘어 학생들이 수업 중인 교실로 몸을 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멎은 후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날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만 무려 50여 명에 달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p.41~42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수년 전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라는 잡지를 보았는데, 유명한 골프선수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그의 60년 일생에 한 살 때부터 매년 찍은 사진과 함께 그가 그해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소개하는 글이었다. 마침 니클라우스는 나와 같은 1940년생이었으므로 나의 일생과 비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매년 찍은 사진은 없었지만 흥미 있게 그의 전력을 읽어보았다.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 골프를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때였다. 그 무렵 나는 6·25전쟁으로 총탄과 폭탄을 피해가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였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의 아마추어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이 19세 때였는데, 그맘때 나는 4·19혁명으로 데모를 하고 역시 총탄을 피한 시절이었다. --- p.78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9월 취임 후 김재익 박사를 경제 수석으로 등용했다. 그는 나의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 선배일 뿐만 아니라 손위 동서이기도 했다. 그는 간혹 군사 독재자를 보필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봉사는 전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 박사는 전 대통령의 경제 수석이 되기 전후로 그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전 대통령은 그즈음에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외교, 통상 등 다른 분야에서도 ‘개인과외’를 받았다. 나도 당시 김경원 비서실장의 천거로 미국 정치와 한미관계에 대해 사흘간 이른 아침에 매일 2시간이 넘게 사적인 강의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배우는 입장에서 교사의 말을 경청하는 착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의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 p.58~59

내가 뉴스위크에 칼럼을 쓰면서 특히 신경을 쓴 것은 한국의 국내 정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의 소위 ‘5공’ 시절이었으므로 민주화를 주창하면서도 정부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뉴스위크는 영문 잡지이고 그 자체로서도 영향력과 무게가 있는 만큼 표현의 방법이나 강도에 상당한 재량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칼럼들을 통하여 당시 정권과 정치권(특히 ‘양김’이 이끄는 야당들)에 훈수를 둘 수 있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임팩트(impact)는 있지 않았을까 싶다. 칼럼을 씀으로써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부수적으로 나 자신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p.65

장관은 그래도 일을 하는 과정에서 차관을 비롯한 부처 직원들의 조언과 브리핑 등 조직의 도움을 받게 되므로 크게 빗나갈 가능성이 적다. 그런데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그런 도움을 받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 특히 민간 출신의 경우 공직에 대한 이해와 경험 부족 탓에 기대에 어긋난 처신으로 간혹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관은 물론이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교육과정을 반드시 이수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직책 수행에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 p.82

외무부 장관 재임 기간 내내 가장 시간과 신경을 많이 썼던 문제는 북한핵 문제였다. 그러나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기 전에도 나는 북핵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92년 11월 미국 의회의 아·태 소위원회(위원장 스티븐 솔라즈Stephen J. Solarz 의원)는 북핵 문제에 대해 청문회를 개최했다. 나는 참고인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 나와 같은 자리에서 발언한 전문가들(나를 빼고는 모두 미국인들이었다) 중에 약 3분의 1은 당장 북한을 공격해야 된다는 입장이고, 다른 3분의 1쯤은 그래도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머지 3분의 1쯤은 중간 입장이었는데, 당시 미국의 강경 분위기에 나는 상당히 경악했다. --- p.88~89

1994년 6월 당시 군사적인 긴장이 어느 정도였느냐의 문제가 상당 기간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전쟁 준비를 맡았던 게리 럭(Gary Luck) 장군이 주한미군 사령관을 맡아 미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동해에서 미 해군이 항공모함 등을 배치하며 북한에 무력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CNN 등 세계 언론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쪽에서 ‘미국이 한국과 충분한 협의 없이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갔다.’라는 비판이 있었고, 그러한 비판은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수그러들지 않았다. --- p.103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권에서 본인의 정치적 라이벌은 물론이려니와 야권의 지도자로 있을 때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도 뚝심 있게 자기 의지를 관철해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다가올 정상회담에 임했다. 대통령은 ‘김일성은 자기가 북한에서 수령이고 어버이라고 하지만, 내가 그 친구는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곤 했다. --- p.111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김영삼 대통령은 흔쾌히 예스(Yes)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미북 협상을 그렇게 흡족하게 여기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겉모습보다는 내용이 중요하지만 외교에서는 형식이나 모양새가 중요할 때도 있다. 마지못해 억지로 떠밀려 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가 이것을 아주 감지덕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 p.118~119

어떤 관점에서 제네바 합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한’ 사례라고 볼 수도 있다.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중지하는 대신 우리가 중유나 경수로 등을 북한에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완전히 핵을 포기하는 단계까지 몰렸기 때문에 오히려 제네바 합의를 깨고 2차 북핵 위기로 간 것으로 본다면 제네바 합의 자체가 상당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이 그것을 위반하는 쪽으로 간 것이 아니겠는가. --- p.129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주의자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 바람을 타고 당선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러한 ‘슬리퍼리 슬로프(slippery slope: 미끄러운 비탈길)’에서 한미관계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사정이 그럼에도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도 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대표해서 주미 대사가 된다는 사실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는 즉답을 피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내가 주미 대사로 내정되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 p.166

노 대통령이 나를 주미 대사에 임명한 데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부시 행정부에 자신은 반미주의자가 아니며 미국과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둘째, 미국이 북핵 문제에 과잉반응하지 않도록 하고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에게는 두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 p.168~169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나도 김정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납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굳은 의지를 재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친근감을 강조하기 위해 ‘대화하기 쉬운 사람(easy man to talk with)’이라고 표현했다. 안타깝게도 이 표현은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쉽게 양보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며 국내 일각에서 트집을 잡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 p.181~182

미국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평가할 때 “그의 행동은 언사보다는 훨씬 좋다(His deeds are better than his words).”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한미 FTA를 추진했다든지, 이라크에 파병을 했다든지, 또는 소위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서 양해를 했다든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중요한(critical) 결정과 관련하여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노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서 “미국에 대해 레버리지(leverage:영향력)를 가지려면 이러한 문제에서 미국에 협조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 p.18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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