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너무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다”라고 한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물질을 중요시 여기는 우리와 달리 그들이 정신과 태도를 제일로 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질서 안에서 우리는 ‘기브 앤 테이크’ 문화로 대변되는 거래에 익숙해 있다. 반면 북측 사람들은 이러한 거래가 사람 사이 본질적인 관계를 흐린다고 여긴다.
--- p. 81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는 적대적 분단체제를 넘어 평화적 통일체제로 전환하는 가교로서의 개성공단에 대한 부정이다. 이제,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던 기적의 공간이 컴컴한 절망의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5만 5,000여 명의 북한 노동자도 당황했지만, 124개 기업의 대표와 직원 800여 명도 크게 절망했다. 이들이 입는 직접적 피해는 생산물, 원료, 기계 등 모든 생산요소를 개성공단에 남겨둔 채 철수해야 한 데서 나온다. 간접적으로는 124개 업체에 납품하던 회사들, 또 이 업체들에서 납품을 받던 다른 회사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입주 기업 중 남북경협보험에 가입된 76곳은 극히 일부의 보상이라도 받지만, 나머지 48곳은 ‘맨손’ 신세다.……개성공단 폐쇄와 더불어 사드 배치, 나아가 핵무장과 대북확성기 설치 등을 ‘자발적으로’ 강행하려는 과정에서 한반도에 전쟁 공포와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 pp. 91~92
역사 교과서 왜곡은 일본만 하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 친일파의 맥을 잇는 기득권층도 앞장서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일제하 산업화는 조선의 발전이었고 오늘날 한국 경제의 초석을 놓는 일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승만 정부의 성격 규정, 4·19혁명, 5·16쿠데타, 박정희식 개발독재, 민주화운동의 과정이 정권과 자본의 시각으로 왜곡되는 것이 현 사태의 핵심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좌파·종북’이기에 척결 대상이다. 흑백논리의 전형이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이렇다. 이제 한국 자본주의, 나아가 지난 수십 년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성장한 한국이 아시아 등을 무대로 ‘아류 제국주의’ 행세를 하며 ‘세계 경영’을 하기 위해서라도, 자본과 권력의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교과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 pp. 111~112
비정규직을 없애고 정규직화를 촉진하며,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가 고용 조정의 대세로 자리 잡도록,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정산 폭이 넓어지지 않도록, 기업별 노조의 틀을 넘어 산별·업종별·지역별 단체교섭이 확산되도록 적극 요구해야 한다. 온라인·오프라인 등 모든 채널을 통해 홍보, 선전, 교육, 소통, 연대가 시급하다. 끝으로, 참된 구조 개혁과 참된 노동 개혁이 무엇인지에 대해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출발점은 직장이나 마을 등 현장의 ‘소모임’이다. 삼삼오오 모임 또는 직원 총회에서 서로 흉금을 트고 만나 고통과 번뇌를 나누어야 한다. 혼자서 불평하거나 돌파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자주 만나고 진심으로 공부하되 열린 자세와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손잡고 나가야 한다.
--- pp. 129~130
나는 속물적 한량이 아니라 ‘소박한 한량’을 꿈꾼다. 소박한 한량의 시간표는 대략 이렇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 등 기본 필요 시간을 12시간으로 잡으면, 의미 있게 활동하는 시간은 12시간이다. 이 12시간 중 생계를 위한 일은 하루 4시간만 하고 다음 4시간은 정말 하고 싶은 활동, 즉 사회운동이나 인문학 모임 등을 하며, 나머지 4시간은 친교를 나누는 데 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매일 행복할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본 적도 없고, 또 언제나 시간을 이렇게 기계적으로 나누어 정확히 지키며 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이에 대한 ‘길잡이별’이 있어야 한다.
--- p. 157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병원자본’의 품에서 태어나고, 성장은 ‘교육자본’의 품속에서 이루어지며, 취업조차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을 통해 가능하고,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은 더욱 ‘산업·금융자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생활은 ‘상품자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여가나 여행조차 ‘레저자본’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프거나 노년이 되면 다시 ‘병원자본’에 의지해야 하고 삶을 마감해도 역시 병원자본이 처리한다. 이렇게 생애 전 주기가 자본 종속적인 구조이니, 자본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 무슨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으랴?
--- pp. 251~252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시 근로자 가구와 비슷했던 농가 소득 수준은 최근 60퍼센트 정도로 추락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농가가 전체 농가의 25퍼센트에 이른다. 도시 근로자 가구야 대체로 아파트 구입 등으로 인해 거액의 부채를 지고 있지만, 농민들은 1년 내내 노동을 한 결과가 온통 부채로 돌아온다.……농업 소득은 1970년 19만 4,000원에서 2013년 1,003만 5,000원으로 51배 정도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농가 부채는 1만 6,000원에서 2억 7,363만 2,000원으로, 무려 1,710배 증가했다. 2015년 현재 농민 한 가구당 부채가 평균 2,700만 원이니, 들판만 보아도 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 pp. 349~350
문제의 근본에는 현재의 경제사회 시스템이 ‘성장 중독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깔려 있다. 즉, 현재의 경제사회 시스템은 인간적 필요가 아니라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비정상적 행위, 병든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이들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거의 무제한 생산하거나(아파트나 자동차, 휴대전화 등), 필요한데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별로 생산을 하지 않는다(농산물, 자연에너지 등). 그 과정에서 농민,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청년, 중소기업인, 자영업자, 이주 노동자 등 수많은 민초가 삶의 힘겨움에 아우성을 치는데도 재벌과 정부는 한사코 외면한다.
--- p. 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