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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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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9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206g | 128*204*20mm
ISBN13 9788932020754
ISBN10 893202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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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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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의 입구


그림자들이 늪지를 다녀갔다
무언가를 버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버린 것이
내 곁에 있다

가슴이 이상해요
구멍 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질 않아요
아무리 깊게 숨을 쉬어도 채워지질 않아요
내 가슴을 좀 채워주세요
흙이라도 한 삽 퍼 넣어주세요
그림자들이 돌아간 거리에선
마른 가로수들이 뽑혀나갔다
가로수로 오인된 사람들도 뽑혀버렸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 나무처럼 빳빳하게 굳어져갔다

스스로 멎어 있음은 혼돈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무들이 흔들렸다

--- p.11


황토(荒土)


지친 바람은 사막으로 가서 죽어버린다
바람의 묘비는 소리로 서 있다
막힌 곳 없는 무한한 길들의 땅에서 너는 무엇을 택할 것이냐

걸어라
무릎에서 모래가 흘러나오다 어느덧 네 온몸이 모래가 되어
언덕을 뒤덮어버릴 때까지
그때까지는 아픔을 말하지 말라
산산이 부서져 모래뿐인 이곳에서 너보다 더 아프지 않은 것들 없으니

--- p.57



굽은 등


1
마을 입구에 쌓인 흙벽돌
부수다 오르다, 지친 아이들
길바닥에 잠들어 있다
아이들 입에
흙먼지의 소용돌이 인다
그새, 마을에 들어서는
늙은 개들의 묘지

2
내 거친 살갗 위에 야자수가 자란다
등가죽을 밟고, 낙타가 온다

낙타를 몰고 떠나가는 길
노을이 지고 비가 내린다
포도주로 젖어가는 낙타의 몸
나는 낙타를 마신다

3
묘지에 늘어선 어린 야자수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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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과 감정은 호흡의 형태를 빌려 바깥을 향해, 타인을 향해 가려 하지만 그의 기질적인 망설임으로 인해 외출(外出)하지 못한다. 고백의 좌절 이후 편지지에 쏟아진 붉은 잉크는 차라리 한 병의 피에 가까워 보인다. 심장이 꺼내놓는 말이 문학적인 표현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피가 검은 잉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산화(酸化)의 시간을 거쳐야 하는가.
그렇게 밤이 지나 아침이 오자 그의 세계엔 빛이 찾아온다. 그가 겪은 상처와 시련은 ‘희다’라는 색채의 이미지와 더불어 표백된 것처럼 보인다.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성화(聖化)된 느낌과 함께, 그가 쓰고 싶었으나 쓸 수 없었던 편지의 일대기는 끝이 난다. 비록 그가 종이 위에 부려놓으려 했던 말의 소포는 끝끝내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물과 빛이 글쓰기라는 제의의 시작과 끝을 감쌈으로써 그의 세계에는 다시 온화하며 온건한 사랑의 가능성이 싹튼다. 온대의 사랑에 이를 때까지, 열대와 한대를 가로지르는 그의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우리의 자리는 언제나 溫帶//아직도 얼지 않은 물이 꿈을 적신다”(「禁忌 1」, 『개들의 예감』).
얼음 속 그의 얼굴이 온대의 빛 속에서 녹으며 웃고 있다. 사람의 발에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그의 유일한 사랑이, 그의 지친 발을 따스한 물로 씻겨주리라. 먼 길을 걸어온 끝에 마침내 자신에게 도착한 그를 위로하며.
허윤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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