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역사철학적 진보에 대한 심각한 비판과 성찰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제 인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진보와 더 급진적인 진보주의가 아니라, 진보 관념에 대한 성찰이다. 먼저 인류가 서구적 가치를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진보해왔다는 믿음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에 대한 다원적 지표를 설정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포괄적인 복수의 지표를 설정함으로써, 진보의 차원을 다원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보의 차원을 다원화한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상호 전이한다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구체적 상황에 따라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가 상호 전이할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적대적인 ‘진영’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34
식민주의 (역)사학은 전형적으로 근대역사학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취하고 있었다. 내재적 발전론의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은 식민사관의 타율-자율, 정체-후진, 발전-진보라는 이항 대립의 도식을 뒤집어놓은 데에 지나지 않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를 단지 뒤집어놓았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할 위험을 원천적으로 안고 있었다.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을 이중적으로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58
아래로부터의 동아시아 그리고 국민국가를 넘어선 성찰적 동아시아에 입각한 새로운 동아시아사 인식과 서술은 동아시아공동체를 위한 신뢰 형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시민사회는 상호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절대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동아시아적 정체성은 이런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비로소 형성되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동아시아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 동아시아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서,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을 환기하고 공유하는 일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통합에 동아시아(지역)사가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100
공공성은 하나의 공동체 혹은 사회를 위해 절박한 문제를 서로 교환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이며, 이는 사회 구성원의 자유로운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공공성은 절박한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를 구분하고, 사회에 부딪친 위험을 공동으로 극복하기 위해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과정을 거쳐 공속성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성은 사회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적극적 지향이자, 공간이나 영역과 같은 고정적인 대상과 관련된 가치라기보다는 유동성을 본질로 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 p.141
지수걸은 관료-유지지배체제를 총독부가 각종 관료기구와 공직기구를 총동원하여 구축한 지방(농촌)지배 조직이나 제도 혹은 그 기제나 양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지방정치 곧 군 단위 지방정치를 유지정치로 규정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국가 차원의 자원 배분을 둘러싼 정치는 일제하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공간이 군이었다고 본다. 지방정치의 핵심이었던 비(반)공식 부문의 정치는 군 단위의 공공단체나 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유지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이런 지방정치를 유지정치라고 이르고 있다. --- p.173
공식기억이란 역사와 민족의 상생관계 위에서 수립되는 기억을 말한다. 이를 역사-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역사학이 국민국가(nation-state) 수립과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에 기여해왔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일 터이다. 역사-기억이라고 할 때, 역사는 국민국가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기억은 민족감정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한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기억과 민족의 상생관계 위에서 ‘기억의 총동원’ 작업이 수행되어왔다. 특히 식민지기의 기억에 대해서 한국의 기억 총동원 작업은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서 본바,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최상의 찬사를 보내야 하는 것으로 공식기억이 만들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대한민국의 정체성 형성과 국민 만들기에도 기억의 총동원 작업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 p.199
일본 제국주의가 ‘대공아공영권’ 논리로 치장하고 아시아 약소민족의 구원을 내세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일본의 민족주의는 보편주의를 가장하고 있었다. 패전 후 일본의 민족주의는 보편주의를 거두고 특수성을 내세워 단일민족의 논리로 후퇴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의 또 다른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고 할 것이다. 민족주의가 가진 저항성이 마모되어 특수성의 논리를 회수해야만 틇 때 민족주의는 보편주의로 자신을 새로이 가꾸는 노력을 거듭할 것이지만, 어디에서도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할 능력을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결여태로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p.215
식민주의의 사명이데올로기는 피식민자들에게 수용되었으며, 피식민자들은 식민지로부터의 정치적 해방 이후에도 그 사명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삼아 문명의 사다리를 올라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를 ‘식민주의’의 잔존을 말하는 증명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적 욕망의 구조는 이처럼 문명의 사다리를 통하여 피식민지에도 전파되었으며, 아직도 강고한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행태를 식민지 경험을 한 신흥 경제 성장국가들이 마찬가지로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런 문명의 사다리라는 구조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욕망의 구조 때문일 것이다. 이광수와 박정희가 보여주었던 문명의 사다리를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의 구조를 통하여, 탈식민시기의 식민주의와 아울러 그 식민주의가 제국주의적 욕망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pp.239-240
식민지 통치기구, 곧 조선총독부를 근대국가(modern state)의 일환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논의는 아직까지 매우 생소하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이른바 수탈론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는 단지 비정상적 ‘강점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통치기구로서의 조선총독부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억압기구로서의 성격을 넘어서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근대국가에 대한 의제국가, 곧 식민국가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군사력ㆍ경찰력에 의해 폭력을 독점하고, 근대적 관료 행정을 확립함으로써 국내를 평정한다. 이를 통해 상품 유통을 원활화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속화하며, 이에 따라 노동의 상품화도 진전된다. 근대적 자본주의 상품 사회의 재생산은 국가의 권력적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는 사회적 부를 자본으로 그리고 사회 구성원을 노동으로 재상품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총독부는 일반적 근대국가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 p.246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기 위해서 국가가 조사를 주도해야 한다는 발상에는 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위기의식과 ‘병리현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먼저 위기의식과 관련하여 한국 민족주의의 순수형적 발상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냉전과 더불어 동결되었던 일제하 협력자 청산 작업은 ‘냉전형 민족주의’가 가진 체제지향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냉전 해체와 더불어 일제하 협력자 청산에 대해서도 의제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탈냉전기 한반도 민족주의는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과 중국의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대두 그리고 그것이 주장하는 포섭적 역사서술의 경향과 맞물려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어쩌면 순수형적이고 순혈주의적인 민족주의의 발상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