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세계는 몹시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정글과도 같다. 회화든, 조각이든,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무엇이든 간에, 이 세계에서 작품을 감상하려면 우선 ‘백지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작품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글을 탐험하듯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숨겨진 보물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대 contemporary 미술을 경험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옛것에 길들여진 시선이 아니라 동시대의 시선이다. 현대미술을 경험할 때는 고정된 견해가 없는 백지상태, 즉 Tabula Rasa 타뷸라 라사 접근법이 필요하다. - p12
이런 미술작품들은 어떻게든 주의를 끌어 볼 이기적인 목적으로 감상자를 놀래키는 듯하다.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이나 오브제를 바라봐 주길 간절히 바란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이런 작품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은 이제껏 사람들이 오해하던 인간 조건의 한 단면을 드러내고, 이제껏 사람들이 간과하던 내적 공포를 선사한다. - p55
사건의 현대미술 Art as Event은 일반적인 퍼포먼스보다 조금 더 범위가 넓다. 강의, 춤, 공연, 행진, 집회, 낭독, 전화통화, 인터랙션 등 미리 계획하고 행위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의 미술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적일 수도 있고 공적일 수도 있으며, 자유로운 형식을 갖출 수도 있다. 특정 텔레비전 채널처럼 지속적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처럼 우발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술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본능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그런 미술의 오브제는 대체로 불확실하고 일시적이다. 결국 남는 것은 미술에 대한 기억, 미술의 잔재, 혹은 사진과 비디오뿐인지도 모른다.-p74
기억할 만하고 의미 있는 미술작품은 하나의 고정된 메시지에 얽매이지 않으며, 다양한 답을 제시해 준다. 발카의 작품은 명확한 해석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단순히 어둡고 우울하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발카와 같은 뛰어난 현대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의미를 겹겹이 묻어 놓으며, 감상자들은 거기서 아주 다양한 해석을 끌어낸다. -p94
유머는 대부분의 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지만 제대로 된 인정을 받기는커녕 미술의 하위 장르로도 자리잡지 못하는 듯하다. 비록 지위는 낮을지언정 유머는 멈추지 않는 기침처럼 반복되며 고루한 미술관과 갤러리 공간을 가벼움 lightheartedness으로 전염시킨다. 우리는 이제 미술관이 요구하는 진중함 seriousness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p111
요즘에는 스펙터클한 미술작품이 많다. 움직이거나 빛을 내기도 하고, 감상자를 놀래키 거나 포위하기도 하며, 작품 안쪽으로 빨아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그 앞에 서 있으면 난쟁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작가들은 작업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증식시키고 확대시킨다. 우리는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싸고, 호기롭고, 무절제한 창조물에 매혹되거나 압도된다.‘스펙터클 spectacle’이라는 단어에는 시각적 의미가 담겨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펙터클한 현대미술작품을 소비할 때는 바라보기 행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크기나 감각에 주의하게 된다. 우리가 블록버스터 작품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거기서 미학적 끌림뿐 아니라 물리적 끌림을 느끼기 때문이다. - p127
스펙터클한 미술이라고 해서 미묘함과 복잡함, 의미와 목적 등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나 경험 역시 미술을 통해서 얼마든지 스펙터클해질 수 있다. - p141
명상의 미술은 개념적 미술과는 다르다. 1960년대 개념미술 운동과도 별다른 관계가 없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애써 보려고 할 필요도 없고,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생각과 씨름할 필요도 없다. 다만 미술작품을 더 잘 이해하고 작품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문화적 미끼들에 걸려들지 않고, 쓸데없는 유혹에 정신을 팔지 않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