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럽은 여론조사에 큰 흥미를 느껴 그 분야를 계속 공부했으며 그가 27세에 아이오와대학에서 취득한 박사학위의 논문은 「신문 독자의 관심 측정에 관한 객관적 연구 방법의 새로운 기법(A New Technique for Objective Methods for Measuring Reader Interest in Newspaper)」(1928)이었다. 그는 이후 드레이크대학를 거쳐 노스웨스턴대학의 저널리즘 교수로 일했다. 갤럽이 노스웨스턴대학에 재직하던 1931년 여름에 실시한 잡지 독자 조사 결과는 놀라운 발견들을 담고 있었다. 그는 1만 5,000가구를 방문 면접하는 방법으로 어떤 광고가 기억에 남는지 물었는데, 그 결과 남성은 품질 소구가 1위, 그다음은 섹스 소구였다. 여성은 섹스, 허영, 품질의 순으로 나타났다. 광고인들이 가장 적게 사용하는 소구 방법이 실제로는 대중의 주목을 가장 많이 끈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제1장 왜 여론조사를 ‘현상 유지를 위한 매춘’이라고 하는가?」중에서
오길비는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일했을까? 그는 시종일관 위악적일 정도로 솔직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작품은 대부분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국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1872~1933)는 “광고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욕망을 창조하는 방법이다(Advertising is the method by which the desire is created for better things)”고 했는데, 오길비에게 광고는 욕망 창조는 물론 욕망 실현의 방법이기도 했다. 소비자의 신분에서 탈출하려거나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라 당신의 부인이다”는 오길비의 말에 그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상도덕과 공정거래 원칙에 투철함으로써 광고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던 광고인, 그에게 찬사 대신 자본주의의 문제를 들이대는 것은 그 얼마나 볼품없는 우도할계(牛刀割鷄)인가. 그 어떤 숨은 뜻이 있어도 좋으니 소비자를 부인이나 남편처럼 대하는 광고인을 많이 보고 싶다. ---「제2장 왜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라 당신의 부인인가?」중에서
맥도날드는 늘 뜨거운 논란의 한복판에 선 글로벌 기업으로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간주되지만, 잠시 눈을 돌려 경영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가맹점들과의 운명 공동체적 파트너십을 형성한 것이 성공 비결이자 중요한 사회적 기여였다. 크록의 다음과 같은 좌우명은 ‘갑질’을 해대는 한국의 프랜차이저들이 꼭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당신이 먼저 1달러를 벌면, 우리가 그다음 1달러를 번다.” 아니면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에릭 슐로서의 다음과 같은 진단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 “맥도날드가 성공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레이 크록이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6장 갑과 을의 파트너십은 어떻게 가능한가?」중에서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대중 민주주의, 그 본질이 바로 광고임을 바턴은 간파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혹 우리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민주주의의 경제적 버전이라 할 광고에 대한 혐오와 비판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여기는 정치인의 대중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자신에 대한 광고 능력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광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세일즈맨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7장 예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일즈맨’인가?」중에서
지식인들은 이념의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카네기에 대해 비판적이다. 한국 사회를 강타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기운이 살아 있는 힐링과 멘토 열풍도 마찬가지다.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이 열풍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구조나 제도 차원의 분석을 제시하면서 개인을 위로하거나 개인적 수준의 처세술을 제시하는 것은 올바른 답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 옳은 말씀이지만, 이런 비판을 대할 때마다 늘 떠오르는 생각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점이다. 힐링과 멘토 열풍에 대한 비판자들은 힐링과 멘토링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이미 자신의 입지를 사회적으로 구축한 사람들이다. 절박한 처지에 놓인 개인에겐 일시적인 위로나마 소중한 게 아닐까? ---「제8장 어떻게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일 것인가?」중에서
믿으면 정말 해낼 수 있는가?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해낼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힐의 ‘성공 방정식’은 결코 방정식은 아니다. 물론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겐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그건 득도(得道)를 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랴. 그럼에도 힐의 책을 통해 ‘부정’을 떨쳐내고 ‘긍정’을 회복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일시적이라 한들 그 이전 상태보다 나빠질 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원칙만 지킨다면 말이다. 성공과 행복의 방정식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과유불급이 아닐까?
---「제10장 믿으면 정말 해낼 수 있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