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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6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844쪽 | 684g | 115*170*40mm
ISBN13 9791188096305
ISBN10 1188096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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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제르베즈는 희망이 사라지면서 불안감에 현기증이 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모든 게 끝났고,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랑티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살육과 악취로 인해 음침한 오래된 도살장부터 새로 지은 희끄무레한 병원 건물까지 제르베즈는 멍한 눈길로 훑었다. 아직은 그저 뻥 뚫려 있을 뿐인 병원의 창문 구멍을 통해 앞으로 죽음이 휘몰아치게 될 텅 빈 병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맞은편 입시세관 벽 너머로 태양이 떠올라 점점 커지면서 한껏 잠에서 깨어나는 파리 위로 펼쳐진 하늘을 찬란히 밝혔다. 눈이 부셨다.
--- p.22

그녀의 꿈은 정직한 사람들 틈에서 사는 거였다. 제르베즈의 말에 따르면, 나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은 도살 몽둥이와 같아서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한 여자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만다고 했다. 미래를 생각할 때면 제르베즈는 식은땀이 났으며, 마치 자신이 공중에 던져졌다가 길바닥의 모양에 따라 앞면으로 떨어질지 뒷면으로 떨어질지 우연히 결정되는 1수짜리 동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제껏 봐온 것들, 어린 시절에 눈앞에 펼쳐졌던 나쁜 본보기를 통해 단단히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쿠포는 제르베즈에게 우울한 생각을 한다고 놀리면서 다시 그 용감함을 칭송했고, 엉덩이를 꼬집으려 했다.
--- p.99

제르베즈는 큰 소리로 계속 세어나갔다. 더러운 세탁물에는 이골이 나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누렇게 때가 낀 블라우스며, 그릇을 닦느라 기름진 국물로 뻣뻣해진 행주, 땀에 젖어 썩어 들어가는 양말 한복판에 소매를 걷어붙인 분홍빛 팔을 쑥 집어넣었다. 그래도 옷더미 위로 수그린 얼굴로 강하게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고 있자니 제르베즈는 일종의 무기력감에 사로잡혔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아 허리를 구부리고서 두 팔을 오른쪽 왼쪽으로 느릿느릿 뻗는데, 희미하게 미소를 띤 채 눈가가 촉촉한 것이 마치 이 인간의 악취에 취한 것 같았다. 제르베즈에게 최초의 나태함은 바로 이 순간, 제르베즈를 둘러싼 공기를 악취로 오염시키는 오래된 세탁물로 인한 질식 상태에서 오는 것 같았다.
--- p.276

두 남녀는 열 마디도 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히 걸어 잠근 방 안에서도 이보다 더욱 애정을 충족하진 못했을 것이다. ‘술고래’가 빈정댔지만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십오 분이 지나면 제르베즈는 숨이 조금 막혀왔다. 열기와 강한 냄새, 연기가 올라와 숨이 막혔고, 둔탁한 망치질로 인해 발꿈치부터 가슴까지 뒤흔들렸다.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제르베즈의 기쁨이었다. 구제가 제르베즈를 품에 꼭 끌어안는다 해도 이토록 감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르베즈는 구제의 망치에서 이는 바람을 자기 뺨으로 느끼고 구제가 내리치는 망치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에 따끔하게 불똥이 내려앉을 때면 손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피부에 휘몰아쳐 비처럼 쏟아지는 불길에 기쁨을 느꼈다. 구제도 물론 제르베즈와 같은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솜씨를 한껏 보여주어 마음을 얻으려고,어려운 작업은 금요일을 위해 남겨두었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모루가 두 쪽으로 갈라질 듯 내리쳤고, 그때마다 그녀를 기쁘게 한다는 데 쾌감을 느끼며 그의 허리도 전율했다. 봄 한철 동안 대장간은 이렇게 두 남녀의 사랑으로 폭풍처럼 요란하게 뒤흔들렸다.
--- p.372

아니나 다를까, 쿠포가 길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문을 잘못 밀어서 하마터면 어깨로 유리창을 깰 뻔했다. 코가 비뚤어질 만큼 심하게 취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제르베즈는 그의 창백한 피부를 보고, ‘목로주점’의 독주가 쿠포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르베즈는 남편이 기분 좋게 포도주를 마셨던 때처럼 웃으면서 남편을 재우려 했다. 하지만 쿠포는 입술을 악물고 아내를 떠밀었다. 그리고 혼자 침대로 가면서 제르베즈에게 주먹을 쳐들었다. 쿠포는 저 위에서 실컷 주먹을 휘두르다 지쳐 코를 골고 있는 주정뱅이 남자를 닮아 있었다. 제르베즈는 문득 온몸에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남자들, 남편과 구제, 랑티에를 떠올리며, 자신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심장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 p.378

아! 그랬다, 삶은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건 자기가 바라던 삶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늘그막을 앞두고 전성기를 누리는 대신 불결한 것들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밖을 내다보다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건물을 살펴보느라 출입문 통로 아래 관리실 가까이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실제로 눈에 보인 것 같았다. 이렇게 13년 전으로 건너뛰자 제르베즈는 심장에 통증을 느꼈다. 안마당은 변하지 않았고, 벌거벗은 건물 전면도 그때와 다름없이 시커멓고 얼룩덜룩했다. 녹이 슨 빗물받이 홈통에서는 악취가 올라왔다. 십자형 유리창에 걸린 빨랫줄에서는 옷가지와 오물이 구덕구덕 묻은 아이 기저귀가 마르고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움푹 팬 포석 바닥이 열쇠업자의 석탄재와 목수의 대팻밥으로 여전히 더러웠다. 심지어 급수장의 습한 구석에 있는 염색소에서 흘러나온 물웅덩이마저도 아름다운 푸른색을, 예전의 그 푸른색만큼 부드러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지금 이 시각, 자신이 엄청나게 변하고 시들어버렸다고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만족스럽고 당당한 모습으로 근사한 집을 꿈꾸지 않았다. 지붕 밑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 절대로 햇빛이 들지 않는 가장 더러운 구석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자기 운명에 기뻐할 수 없었으니.
--- p.606

쿠포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워 있었다. 제르베즈는 주머니에 남편에게 위안을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애석해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나와버렸다. 밖으로 나와 병원 맞은편에서 돌아서서 건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쿠포가 저 건물 위쪽 지붕 홈통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햇빛을 받고 흥얼거리며 함석판을 놓던 옛날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 쿠포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의 피부는 마치 소녀 같았다. 제르베즈는 봉쾨르 호텔 창문에서 쿠포를 찾았고, 하늘 한복판에서 그를 발견하곤 했다. 그러면 두 남녀는 손수건을 흔들며 손짓으로 서로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랬다, 쿠포가 저 위에서 일했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명랑하게 재잘대는 참새 같던 남편은 지붕 위에 없었다. 대신 까칠한 피부를 하고 지붕 아래 병원에 보금자리를 틀고 죽으러 와 있었다. 세상에, 사랑하던 시절은 어쩌면 이토록 멀게만 느껴지는지!
--- p.649

제르베즈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여섯 층을 올라가는 동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을 후비는 지독한 웃음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바라던 꿈을 떠올렸다. 조용히 일하고, 항상 먹을 빵이 있고, 잠잘 수 있는 적당히 깨끗한 집이 있고, 아이들을 잘 기르고, 얻어맞지 않고, 자기 침대에서 죽는 것. 아니, 정말이지 우스웠다. 어쩜 이 모든 것이 기가 막히게 이뤄졌는지! 자기는 더 이상 일하지 않았고, 먹지 못했고, 쓰레기 더미 위에서 잠을 잤으며, 딸아이는 남자 꽁무니만 쫓아다녔으며, 남편에게는 구타를 당했다. 이제 길바닥에서 죽기만 하면 되었다.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이룰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창밖으로 몸을 던질 용기만 있다면. 어떻게 감히 3만 프랑의 연금과 사람들의 존경심을 달라고 신에게 부탁할 수 있었을까? 아! 정말이지, 살면서 아무리 소박한 꿈을 품어봐야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먹을 것과 잘 곳, 그마저도 없는 것이 평범한 이들의 운명이니. 제르베즈는 더욱 뼈아프게 쓴웃음을 지었다. 20년 동안 다림질을 한 뒤 시골로 물러나 살겠다는 멋진 꿈을 꾸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렴! 그녀는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시골로 말이다! 풀이 무성한 페르라셰즈 묘지 한구석을 바라고 있었으니.
--- p.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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