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특히 당신을 지칭하여 한반도의 남쪽을 강점한 흉악한 강도라고 강변하면서 흡사 철천지원수처럼 당신을 적대시하는 북쪽의 빨갱이 집단은 물론 그저 건뜻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자주다 민주다 통일이다 하면서 당신께 주먹질을 하는 남쪽의 그 수많은 불량배들을 응징하기 위해 나는 사실 잠 한번 편히 자본 적이 없었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러한 내 마음가짐의 덕분이랄까요. 생각하면 내가 국보법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해 첫해만 해도 나의 활약이 얼마나 눈부셨습니까.
35. 아니 이게 무슨 망측한 소리죠? 당신이 빨갱이 그것들과 무슨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한다니 말입니다. 처음엔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설마 해서가 아니라 이건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정신 상태에 갑자기 무슨 이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망언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당신에게 지금 뭣이 부족해서 우리들의 철천지원수인 북쪽의 그 빨갱이 집단과 어이없게도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거죠?
67. 이놈아 슈퍼맨이든 괴물이든 뒈질 줄 모른다는 점에선 그게 그것 아니냐.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그것들을 모다 괴물 비슷한 슈퍼맨으로 만든 것은 어이없게도 그것들의 사회를 뒤덮고 있는 예의 그 ‘주체’니 ‘선군’이니 하는 구호가 조화를 부려서라는구나.
73. 너 이놈 평화협정 때문에 머리가 아주 돌겠구나. 아 평화협정이든 전쟁협정이든 그 길이 내가 사는 길이라면 너 같으면 어쩌겠냐. 한번 부딪쳐봐야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던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구요? 아 이놈아 나의 미래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미래까지 왈가왈부하겠어. 하여튼 요즘 세월이 하 수상하다니 너 몸조심 하거라.
---「편지한통」중에서
76. 나의 부친인 허허 선생마저 통일 통일, 하고 턱없이 통일을 다 외쳐대게 되었단 말인가. 평생을 통일과는 사뭇 천리만리나, 아니 하늘과 땅만치나, 아니 이승과 저승만치나 그렇게 멀리멀리 떨어져서 서로 간에 꼭 원수처럼 살아온 허허 선생의 형편에 말이다.
87.그렇습니다. 아주 영원, 영원합니다. 우리 미국이 보증합니다. 이 지하궁전의 모든 시설물은 우리 미국이 이미 실험을 끝냈습니다. 아셨습니까? 실험 결과는 만, 만점입니다. 이 지구상에선 이 지하궁전보다 더 안전한 인간의 안식처는 없습니다. 이제 땅 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나라에 갖다 놓은 그 많은 핵폭탄이 꽝 하고 한꺼번에 다 터져도 이곳만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아셨습니까?
98- 아니 일본 천황한테서 직접 상을 받은 미스터 허허 같은 분이 어디 그리 흔합니까? 미스터 허허 같은 분이야말로 앞으로 이 나라의 기둥감입니다. 일본 시대 허허 씨가 훌륭한 일 많이 한 것처럼, 우리 미국 시대엔 더욱 훌륭한 일 많이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미군정이 정한 법과 질서를 어기는 불령분자들, 이 나라에 지금 참 많습니다. 남북이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놈들,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놈들, 친일파 벌주자는 놈들, 미군 나가라는 놈들, 노조 만들자는 놈들, 지주 나쁘다는 놈들, 배고프다고 떠드는 놈들, 노동자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놈들, 이놈들이 다 우리 미군정의 법을 어기는 불령분자들입니다. 말하자면 빨갱이들이지요.
111. 이 애비가 죽으면 너라고 해서 뭐 남아나겠니? 그러니까 너도 무장을 단단히 해야겠어. 지금 놈들은 평화 통일이니 개나발이니 해싸며 반공법을 걸고넘어지면서 빨갱이들과 짝짜꿍이 되어 통일을 하겠다구 설쳐대니까 말이다. 알겠느냐?
116. 허허 선생이 기자회견까지 했단 말이지? 그랬어? 뭐야? 이번엔 미군 철수까지 주장했다구? 아니 허허 선생이? 그게 정말인가? 지금 거짓말을 할 때냐구? 그도 그래, 정말 큰일이군.
뭐야? 남의 나라 군대가 와서 우리나랄 가로타고 앉았으니 통일이 될게 뭐냐구 그러더라구? 허허 참. 뭐? 또 뭐야? 뭐, 동반자 관계? 북쪽의 빨갱이들도 이제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 관계라고 떠들더란 말이지? 서로 친하게 지내야 통일이 된다고 그랬다고? 이거 점점 큰일이군 그래. 뭐 신사고! 아니 신사고가 뭐야? 허허 선생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말끝마다 그저 이제 앞으로의 세상은 생각을 달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도 떠들어서 회견 제목을 신사고라 붙였단 말이지?
122.그렇다. 신사고다, 이놈아. 히히히. 이제 구태의연한 생각을 가지곤 세상을 살아가기가 썩 어려워졌어. 그만큼 세상이 절박해졌다, 이 말이다. 그런즉 너도 이제 생각을 바꿔라, 이 말이야. 알겠느냐? 히히히.
---「신사고」중에서
130. 어디까지나 성조기의 편에 서서 미국의 번영과 그리고 인류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작업에 뜻을 같이한 자유세계의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미 누차 반복하여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과 그리고 자유와 안전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고 있는 본 펜타곤 당국은 최근에 극동의 일각인 코리아의 한 조그마한 산등성이 밑에서 벌어진 그 우려한 만한 사태에 접하고 놀라움과 동시에 격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39. 저는 지금 모든 것을 대충은 다 알고 있으니깐요.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란 것도 알고요, 오로지 정치자금을 제공한 몇몇 분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위해서 입법이며 행정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143.어머니. 겨우 여남은 살짜리 철부지였던 저의 눈앞에 그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공개하여주신 당신의 그 음부가 이렇게 오래도록 한 인간의 가슴속에 깊은 상흔을 남길 줄이야 당신도 미처 모르셨겠지요
147. 밤새 지우고 찢고 하면서 정성껏 만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우고 나는 듯한 걸음으로 무슨 환영대회에 나가시던 날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늦게 당신은 절망스럽도록 이지러진 표정으로 짐승처럼 해괴한 소리를 치시며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다만 아연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판인가.
154. “기대하여 주십시오. 전 세계의 시민 여러분. 앞으로 십 분, 이제 단 십 분 후면 오물을 파괴하는 아름다운 섬광이 여러분들의 심신을 황홀한 도취의 광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수호하는 미 병사의, 아니 미 병사의 아내를 강간한 자의 말로가 얼마나 참혹하고 싸늘한가를 말입니다. 자, 감상하여 보십시오. 오물은 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씨는 송두리째 뽑아야 하는 거구요. 악의 씨를 뽑기 위한 이 성스러운 작업에 투자한 액수가 물경 삼억 불. 여러분, 똑똑히 보시고 역사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악의 씨가 폭발하는 이 역사적인 광경은 본 펜타곤 당국이 선발한 프런티어 텔레비전이 코스모스 위성을 통해서 지구의 곳곳마다 선명하게 잘 전하여 줄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강간자여! 미국의, 아니 자유민의 명예에 똥칠을 한 간악한 범법자여! 천벌을 받으라.”
155.
기가 막히는군요. 저보고 뭐 강간자라구요. 이게 다 거의 헛소리라면 당신은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아니, 설혹 제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간을 했다면 왜 천벌을 받습니까. 당신을 강간하여 저승으로 인솔하기까지 한, 어떤 코 큰 친구도 천벌을 받았다면 혹시 또 모르지만 말입니다.
169~170
그리고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그리하여 제가 맛본 그 위대한 대륙에 누워 있는 우윳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이 한 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 놓을 결심인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머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 그래도 당신은 저를 못 믿으시고 몸을 떠시는군요. 참 딱도 하십니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앞으로 단 십 초. 그렇군요. 이제 곧 저는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새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야지요. 그리하여 제가 맛본 그 위대한 대륙에 누워 있는 우윳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들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이 한 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 놓을 결심인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어머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 그래도 당신은 저를 못 믿으시고 몸을 떠시는군요. 참 딱도 하십니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 툭 솟아나온 눈깔을 말입니다. 글쎄 이 자식이 그렇게 용이하게 죽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분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