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서 얀 반 에이크의 걸작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빈틈없는 구성으로 보아 엄청난 대작일 거라고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 사이즈는 82.2× 60센티미터 정도로 생각보다 작아 조금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리 확대해도 흔들리지 않는, 굉장히 치밀한 구성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캔버스에는 결혼을 하는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의 완성도도 놀랍지만,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의 발 아래에 앉아 있는 개와 천장에 달려 있는 샹들리에, 벽에 걸려 있는 거울 등 주위에 작게 자리 잡고 있는 사물 하나하나까지 정말 놀라우리만치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조그만 거울에 나타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얀 반 에이크 자신의 형상이 담겨져 있는 데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즉 그림에 등장하는 개는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고, 벗어놓은 샌들은 그들이 신성한 장소에 있음을 나타내며, 창가에 놓인 사과는 인간의 원죄를 드러내는 식으로 다양한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데,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종교화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은 그림을 확대해보면 어딘가 부족한 점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아무리 크게 확대해도 구성이 흐트러지지 않고 단단함을 잃지 않을 만큼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탁월한 표현력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은 하이비전 방송에도 필적할 만큼, 어떤 부분을 얼마나 많이 확대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치밀함과 놀라운 구성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지 탁월한 실력을 넘어 ‘기적의 실력’이라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근대 이후,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력이 아니라는 관점이 형성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나는 그것이 현대미술로부터 대중의 관심이 멀어지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그림을 평가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아르놀피니의 결혼〉처럼 정말 잘 그려진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창조한 화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에 찬탄을 넘어 뭉클한 감동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런 뛰어난 그림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쉽게 그려낼 수 없는 진정한 걸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가령, 내가 지금의 나와 똑같은 재능을 갖고 5번 다시 태어난다고 가정할 때 60세까지의 인생을 5번, 총 300년 동안 시간을 들여서 연습한다고 해도 절대 그릴 수 없는 그림입니다. --- pp.66-69
다 빈치의 탁월함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1503~06년, 패널에 유채, 77× 53cm, 파리 루브르 미술관)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초상화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배경이 조금 이상합니다. 배경에는 창세기를 연상케 하는 대지에 강이 흐르고 있고, 그 바로 앞에 왼손에 오른손을 살포시 얹은 여성이 미소를 짓고 있는, 단순한 부조화를 넘어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어떤 어색함이나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베르메르 그림의 경우, 일상 속의 한순간이 절묘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에서 한순간을 떼어내어 영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드는, 그 점이 바로 베르메르의 탁월함이죠.
그에 반해 다 빈치는 약간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의 비일상적인 조합을 캔버스에 조화롭게 담아냄으로써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세계를 표현해냅니다. 한데, 대중이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것은 그런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의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편안한 존재감입니다. 이상한 풍경에 인물이 결합된 형태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만들 정도의 회화적 탁월함이 다 빈치의 그림에는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함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발견됩니다. 〈최후의 만찬〉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입니다. 다 빈치가 이 그림에 담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안에 나를 배신한 자가 있다”라고 말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화면 오른쪽 끝의 세 사람은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지 갑론을박하고 있고, 예수 바로 오른편의 세 사람은 예수에게 ‘그게 저입니까?’ 하고 당황해하며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림의 왼쪽을 보면 예수 바로 옆에 있는 요한만 슬픈 듯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다섯 명은 시선을 예수에게로 향한 채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진짜 배신자인 유다는 비록 시선은 예수를 향해 있지만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 몸짓에서 배신자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매우 자연스럽게 느끼면서, 그런 정황들을 세밀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현실 속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예수가 “이 안에 나를 배신한 자가 있다”라고 말한 순간과 놀란 제자들이 예수에게 그것이 누구인지 케어 묻고, 갑론을박하기까지에는 일정한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 그림 안에는 그런 ‘저마다의 시간’이 잘 녹아 있습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어떤 심리상태에서 어떤 감정으로 예수의 말을 들었을지 생각해본 다 빈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시간을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녹여냄으로써 각 제자들을 독자적인 내면세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표현해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적’이라는 단순한 수사를 훨씬 뛰어넘는 비범함과 탁월함으로 무장한 그림입니다. --- pp.76-78
보통으로는 그리고 싶지 않다, 보통과 정반대로 행동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술가란 본시 개인의 개성과 표현을 중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생활까지 철저히 괴짜로서의 삶을 추구한 달리는 역시 평범한 화가는 아닙니다.
자서전에는 그의 그런 생각이 “사실 일생동안 내가 접하는 인간들, 세상을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혼란스러운 ‘정상성’에 익숙해지는 것이 몹시 괴롭고 힘들었다”라는 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에 늘 당황하며 ‘나는 인간이 그토록 환상을 품지 못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늘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인간의 맹목적이고 지루한 습성은 나를 경악케 만든다. 왜 인간은 이렇듯, 한 줌도 안 되는 환상밖에 품지 못하는 걸까’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레스토랑에서 구운 가재요리를 시켰을 때 왜 바싹 구운 전화기를 갖다 주지 않는지, 또 은행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이전의 어떤 화가도 ‘흐늘거리는 시계’를 그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갑니다. 아무튼 달리는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의 소유자이자 대단한 정신의 유연성을 가진 화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런 말을 통해 우리는 〈기억의 고집〉이라는 유명한 작품에서 흐늘거리는 시계가 나무에 늘어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그에게는 ‘은행직원이 고객의 수표를 먹어버리는 일’과 같은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달리의 심리 상태는 일관되게 절대로 평범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보통인 사람이 보통으로 생각하고 보통으로 행동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왜 그렇게 개성적이지 못하냐, 평범하냐, 당연한 세계에 당연하게 살면서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냐, 하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달리는 아프리카 오브제(objet,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옮긴이) 반대, 모던스타일 오브제 반대, 조형미술 반대, 정물화도 반대, 하는 식으로 모든 것에 반대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적’과 ‘아군’으로 나눠갑니다.
“그 적들은 누구였나? 모두 다였다. 아니, 갈라(달리의 아내)를 제외한 거의 모두가 나의 적이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적은 단순성이고 아군은 복잡성, 적은 평등주의고 아군은 위계질서, 적은 음악이고 아군은 건축”이었습니다. 또한“여자들이 적이고 아군은 갈라, 남자가 적이고 아군은 나 자신, 시간이 적이고 아군은 흐늘거리는 시계들’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그의 자서전에는 ‘렘브란트가 적이고 베르메르가 아군’, ‘시금치가 적이고 달팽이가 아군’ 하는 식으로 알 수 없는 구별까지 되어 있습니다.
달리라는 화가는 항상 격렬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자극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서 아이디어를 제거하면 달리는 더 이상 달리가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듯 넘치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던 ‘비딱한 정신’을 토로한 자신의 자서전조차 사실은 거짓투성이라며 달리는 나중에 고백한 바 있을 정도이니, ‘보통’이 싫기는 정말 싫었던 모양입니다.
달리는 단순히 작품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까지 비범한 욾이디어를 연출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이고 새로운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p.2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