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고려왕조의 성립에서 의종대 무신란에 이르는 기간의 정치사에 관한 것이다. 이 시기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대체로 왕권과 호족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에 관심을 보였다. 태조의 대호족정책이나 혜종대의 정변, 그리고 광종의 왕권강화 등에 적지 않은 논문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대 이후의 정치적 사건이나 정치세력의 분석에는 소홀하여, 이자겸의 난이나 묘청의 난 등을 언급한 정도에 불과했다. 성종대 이후가 귀족사회임을 입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정치적 사건의 해명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종대로부터 무신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사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는 이러한 빈틈을 메워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 가운데 기왕의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주목해 보았다. 우선 광종의 왕권강화에 적극 기여한 인물들이 누구였는가를 밝혀보고자 했다. 기왕의 연구들은 광종대의 왕권강화책을 언급하면서도 이러한 왕권강화를 이루어낸 광종의 세력기반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이다. 제1부 제1장의 「최승로의 상서문에 보이는 광종대의 ‘후생’과 경종 원년 전시과」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드러날 것이다.
성종의 최승로의 견해를 정치에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최승로로 대표되는 신라 6두품 출신이 성종대의 정치를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광종대 과거로 진출한 인물들은 어떠했는가 궁금하다. 기왕의 연구가 이후 그들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종의 뒤를 이어 목종이 즉위한 것도 성종대의 정치세력과 관련하여 해명이 되어야 할 문제이다. 목종은 호족세력인 황주의 황보씨가 후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2장 「서희와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목종대에 일어난 정변의 결과 목종은 제거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어떤 세력이 무슨 이유 때문에 정변을 일으켰으며, 이 정변으로 화를 당한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이 정변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점들은 3장 「목종 12년의 정변」에서 밝혀질 것이다.
현종이 즉위한 후에는, 곧 진압되기는 했지만,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의종대의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방제도가 대폭 개편되었데, 이때 개편된 내용이 대체로 후대까지 지속되었다. 현종대 이러한 변화가 초래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제4장 「현종대 과거 출신 관리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은 현종대 이후의 이러한 변화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한편 현종·덕종대는 대거란 관계를 둘러싸고 관리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이러한 갈등은 후대 고려인들 사이에 회자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어떠한 관리들이 왜 대거란 강경론을 폈으며, 온건론을 편 관리들은 누구였고 왜 그러했는지 궁금하다. 제5장 「현종·덕종대 대거란 관계를 둘러싼 관리들 간의 갈등」을 통해 이러한 궁금증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가 귀족사회였다고 주장한 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인주이씨 가문의 번성과 그들의 혼인관계를 거론한다. 인주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이 문종에게 세 딸을 바친 이후, 대대로 왕실과 혼인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집안들과도 혼인을 통해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은 왕실이 인주이씨와 혼인한 배경에 대한 설명은 결여한 채, 인주이씨가 왕실에 혼인을 강요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왕실이 인주이씨에 굴복할 정도로 무력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왕실과 인주이씨와의 혼인이 인주이씨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왕실이 의도한 것이었다면, 이는 고려사회의 성격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인주이씨와 왕실과의 관계를 검토하여 문종대 이후의 정치상황을 알아보려는 것이 제6장 「문종-인종조 인주이씨의 정치적 역할」이다.
숙종·예종대는 여진에 대한 정벌이 행해졌다. 이 여진정벌에 대해서는 주로 총사령관이었던 윤관 개인의 업적이나 9성의 위치 등이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그보다는, 왜 여진정벌이 행해졌는가를 당시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검토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저자가 제7장 「숙종·예종대의 여진정벌」을 작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종 때에 일어난 서경천도운동과 묘청의 난에 관한 학계의 관심은 상당한 것이었다. 이에 관한 연구가 적지 않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서경천도론이 제기된 배경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서경세력 대 개경세력, 혹은 문벌귀족세력 대 신진세력의 갈등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어느 연구에서도 그들이 왜 그러한 주장을 했으며 또한 이에 반대한 인물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은 드러나 있지 않다. 즉 서경세력이나 신진세력은 왜 금국정벌이나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며 개경세력이나 문벌귀족세력은 왜 여기에 반대했는가 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연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는 여전히 모호하다. 한편 서경천도론에 적극 반대하여 후일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은 그 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김부식이 이를 쓴 이유를 밝힌 논고는 아직 없다. 제8장 「인종조의 서경천도·칭제건원·금국정벌론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의문들이 해결될 것이다.
의종 때에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무신란이 폭발하였다. 무신란의 원인으로는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와 군인들의 불만, 그리고 국왕인 의종의 실정失政 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나 군인들의 불만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으므로, 이것만으로는 무신란이 왜 하필 의종 때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의문을 충분하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의종 때 무신란이 일어났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의종대의 정치적 상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에 쓰여 진 것이 제9장 「『상정고금예문』의 편찬 시기와 그 의도」와 제10장 「의종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신란」이다.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 상당수는 고려의 관품 가운데 5품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 왔다. 5품 이상의 관리들은 정치적으로 음서의 혜택을 누렸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공음전시를 지급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5품 이상의 관리들을 고려의 귀족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당시의 관리들 가운데 신분상 하자가 없는 인물들의 경우, 5품으로의 승진을 갈망했다거나 5품으로의 승진에 제약이 가해졌다는 기록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5품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5품 이상의 관리들이 그 이하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면, 모든 관리들은 5품으로의 승진을 갈망했을 것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일정한 제약이 뒤따랐을 법한데, 그러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저자가 주목한 것이 「고려시대의 참직」이다. 이를 통해 음서에 의해 관도에 진출한 관리들이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등, 고려에서 과거가 음서보다 중시되었던 이유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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