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내게 먼저 말을 꺼냈소. 그 알량한 편지에도 썼건만 ‘멀쩡히 직장 잘 다니고 있는 사람이 왜 귀농할 생각을 했냐’고 내게 재차 물었소. 첫째, 남을 밟고 내가 올라가야 하는 사회, 남들이 짜놓은 틀에 내 삶을 맡기고 사는 사회가 싫다고, 그래서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었소. 둘째, 사회가 요구하는 길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갔다고 생각하니, 이제 남은 삶은 남자로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고 싶다고 했소. 셋째, 나의 아이들만큼은 학원숲에서가 아닌 자연에서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대지와 함께 호흡하며 자라게 하고 싶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오. --- p.6
민들레는 다른 꽃과는 달리 꽃이 지고 나면 후편이 이어진다. 제삿밥처럼 고봉으로 씨를 매달고 서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람과 맞서고 서 있는 둥그런 씨 봉오리를 보면 뒷간을 가다가도 발로 찼다. 그렇게 차주는 것이 번식을 돕는 일이라는 알량한 마음도 작용을 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뒷간 가면서 그것을 발로 걷어차지 못했다. 결코 씨 한 톨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자식들을 둥그렇게 끼고 있던 민들레가, 때가 되면 사방으로 자식들을 떠나보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떠나보내고 나면 달랑 빈 몸뚱이만이 바람을 맞고 있다가 어느 날 자취도 없이 스러지곤 한다. --- p.72
마침 포크레인이 도착하는 날은 아내가 출타 중이라 홀가분하게 포크레인을 내리고 잔금을 지불했다. 기쁜 마음에 이것저것 조작을 해보는데 산골아낙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를 보는 눈빛이 ‘저 인간 또 사고 쳤군…’ 하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정도 잔소리를 들으리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말이 없다. 아마도 잔소리를 해봤자 자기 입만 아프리라는 걸 예상했나 보다. 이럴 때는 나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열심히 포크레인으로 일하는 척하는 것이 수다. 사고를 많이 치다 보면 거의 심리학자 수준이 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계속 사고를 칠 수가 있다. --- p.125
귀농 전, 도시에서의 출근길은 전투복장을 하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지고, 피 흘리고, 곪는다는 생각에 검도선수처럼 머리엔 호구를 쓰고 철갑 옷을 입고 속에 철근이 박힌 안전화를 신었습니다. 방탄조끼보다 더 센 조끼를 입어야 어떤 화살에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생각에 온몸에 철갑을 두르듯 했습니다. 그래도 돌아올 때는 패잔병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연으로 출근하는 귀농 후의 아침 모습은 다릅니다. 다 닳아빠진 바지에, 강한 햇살에 등이 바래질대로 바래진 윗도리, 비닐 장화를 신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도 돌아올 때는 콧노래 부르며 시큼한 땀 냄새에 더없는 뿌듯함을 꼭 끌어안고 둥지로 향합니다. 오늘 밭에서 퇴근하며 생각해보니 그게 도시와 다르네요. --- p.140
한 단을 키우기 위해 거름을 펴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뙤약볕에 풀을 뽑고, 거두고, 거기다가 일일이 다듬고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 무를 다 씻어서 묶어놓은 값이 천 원이라니. 귀농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나는 그 수고로움을 빤히 알지 않는가. 나는 3천 원을 건네고 묵직한 열무 세 단을 건네받았다. 주현이는 열무단을 손에 들더니 휑하니 앞서가며 한마디 한다. “엄마한테 실망했어.” “왜 그러는데?” “엄마, 할머니가 그러셨잖아. 방금 전까지 2천 원에 팔았다고. 그럼 2천 원씩 쳐드려야지. 천 원 달라고 했다고 천 원만 드려?” 안 그래도 우리 집에서 맺고 끊는 것이 제일 분명한 놈이 쌩 소리가 나게 쏘아붙인다. 거기까지만 해도 마음이 뻐근하건만 몇 마디 더 날카로운 말을 껌처럼 덧붙인다. “엄마도 농사지으면서… 그게 천 원밖에 안 되냐고. 그것도 할머니인데….” 열무단을 들고 터덜터덜 걷는 주현이의 뒤통수에 잔뜩 화가 묻어 있다. 허우대만 멀쩡한 줄 알았는데 석류알처럼 속이 차고 있는 거다. 저런 고운 마음은 인간이 물들였을까. 자연이 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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