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세대인 50, 60대 시니어와 함께하는 그림책 수업의 첫 시간 역시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고 있는 일이나 가족관계보다는 자기 이름의 한자(漢字) 풀이나 이름에 담긴 뜻, 얽힌 이야기, 이름을 지어주신 분에 대한 추억, 살아오면서 이름으로 인해 있었던 일들을 자유롭게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발표가 끝나면 수업 시작 전 출석 확인을 하며 한 장씩 찍은 즉석 독사진 밑에 자기 이름을 써서, 강의실 앞쪽에 세워놓은 ‘전설 나무’에 직접 갖다 붙이기로 했습니다. ‘전설 나무’라고 해서 별다른 것은 아니고 초록 잎이 무성하고 둥치가 굵은 나무를 물감으로 그린 가로 60cm, 세로 90cm 정도 크기의 그림판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월을 살아낸 우리들, 비바람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느라 비록 여기저기 옹이가 생기고 휘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의젓하게 서 있는 것 자체가 전설이기에 ‘나는 전설이다’라고 명패를 써 붙였고 그래서 자연스레 ‘전설 나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 p. 15
누군가 ‘가까운 친구 열 명을 꼽았을 때 세 명 이상이 열 살 연하거나 연상이면 세대차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저야말로 이 모임을 통해 위아래 띠 동갑을 여러 명 만났고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선후배들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돈이 생기기는커녕 자기 밥값 자기가 내야 하고, 수료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경력관리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도 없지만, 그 저 노년 이야기가 좋고 사람들이 좋아 모이는 것을 보면 순수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대에 맞지 않는 바보들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임이 17년이나 계속되어온 것을 보면 나름의 매력이 있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 매력에 ‘함께 나이 들어가는 즐거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대학 신입생으로 처음 자기소개를 했던 회원이 이후 휴학과 어학연수, 졸업, 취업, 퇴직, 귀향 후 결혼과 출산, 재취업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가 한걸음씩 성장하는 것에 제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연로하신 아버님의 치매 간병을 계기로 처음 모임에 나왔는데 이미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처음 마음으로 모임에 출석하는 회원의 머리에는 그 사이에 하얗게 서리가 앉았습니다.
--- p. 86
왜 그렇게도 갖고 싶었을까요? 아니, 정말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가지지 못해 속상했고, 가질 수 없어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설사 그것을 가지지 못한다 해도 큰일 날 것이 전혀 없었지만 아이는 오래도록, 때론 평생 잊지 못합니다.
할머니의 빨간 구두가 한 켤레의 신발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여전히 갖고 싶은 그 무엇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구두가 저 혼자서 노래를 부르거나 뛰거나 춤을 추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의 빨간 구두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꿈이라 바꿔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림책 수업 시간에 ‘내 청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 꿈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이 있는가 하면,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걸어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비록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꿈이 있었기에 일찌감치 삶의 균형을 잡고 노력할 수 있었고 덕분에 분야는 다르지만 나름의 열매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 p. 104~105
‘일’이라는 주제로 그림책 수업을 할 때 제목을 “밥, 돈, 땀: 내 평생의 일들, 땀 흘려 밥을 얻고 꿈을 꾸다”라고 정하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해온 일들을 쭈욱 적고 그 옆에 거기에서 연상되는 단어들을 쓰도록 했습니다.
저는 우선 ‘아나운서’라고 쓰고 그 옆에다가 젊음, 열정, 꿈, 만남, 사랑을 썼는데, 아나운서는 저의 간절한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루어 아나운서가 된 후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으며, 일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만남’을 경험했고 지금까지도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한때 했던 일, 지금 하고 있는 일, 앞으로도 쭈욱 이어질 일,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요소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해오던 일을 그만둔다는 점에서 은퇴가 우리에게 그토록 큰 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일에는 은퇴가 있어도 인생에는 은퇴가 없다는 말도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은 일을 생활의 중심에 놓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일이 인생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기둥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쯤에서 낀 세대인 시니어들의 새로운 시작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p. 121~122
노인대학 수업시간에 ‘내가 요즘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를 주제로 그룹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각 그룹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니 공통점은 물론이고 저절로 순위까지 정해졌습니다.
‘식구들 모여서 밥 먹고 이야기 나눌 때’가 1위였고, ‘자식들이 찾아올 때’가 2위, 그리고 ‘손주들 자라는 것 볼 때’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 보낼 때’가 공동 3위였습니다. 그밖에 자식들의 승진, 손주들의 상급학교 진학, 부부 해로, 취미활동할 때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니, 젊어서는 생활의 소소한 일들이 진짜 즐거움이고 그게 바로 사는 재미라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정신없이 살아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지내놓고 보니 즐거움을 많이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후회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어서일까요. 많은 어르신들이 주어진 시간을 재미있고 알뜰하게 보내면서 젊었을 때와는 또 다른 행복을 찾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니 나이 먹으면 아무런 즐거움도 재미도 못 느낄 거라는 짐작은 나이에 대한 오해와 편견입니다.
--- p. 169~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