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데카르트가 세속화하고자 한 것은 단지 과학뿐이지 종교는 아니었다. 데카르트가 내면적으로나 겉으로 드러난 태도에서나 기독교인이자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맹세할 때, 자신의 평온을 위한 과도한 조심성조차도 그의 진실한 신앙, 그리고 그의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의 원인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럼직한 사실은 데카르트에게 종교적 정신이 특수하거나 쇄신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스스로 종교적 정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미 확고하게 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우연히 신비주의적인 외양을 보였을 뿐이다. 오히려 데카르트는 확고한 결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계시된 진리에 대한 믿음이 의지 행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데카르트는 지적 혁신에 대한 자신의 계획에서 단호하게 종교를 제외했다. 그는 종교를 과학적·철학적 확실성과 비교될 수도 없고 관계 맺을 수도 없는 특수한 성격의 확실성을 갖는 별개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가 종교가 철학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분명 스콜라학파의 신학으로부터 종교가 독립적인 것이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 p.38
데카르트가 나타났을 때 근대 철학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근대 철학을 확립한 것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의 체계는 독창적이고자 했고 실제로 독창적이었다. 그의 체계가 독창적이었던 것은 우선 체계의 기원을 자아로부터 또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부터 도출해냈기 때문이다. 그의 체계가 독창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어느 정도 자명한 방식으로 그러나 확실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상의 발전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방향에서 미래의 학설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데카르트의 체계는 이 학설들 모두의 진정한 기원이었다.
--- p.67
과학자로서 데카르트가 내세울 만한 두 개의 위대한 권리가 있는데, 바로 해석기하학의 창안과 물질계의 모든 현상을 포괄하는 기계론적 물리학의 구성이다. 그런데 과학에서 이 두 종류의 업적이 데카르트 없이도 생겨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일단 매우 타당해 보인다. 과학에서 해석기하학과 기계론적 물리학은 데카르트 이전에 그 핵심이 이미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해석기하학은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의 기하학적 해석과 비에트의 대수학적 해석에 의해 직접적으로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기하학의 문제를 대수학적 문제 해결에 할당한 해석기하학의 구성 절차도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미 페르마에 의해 매우 명시적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모든 것을 크기, 형태, 운동에 의해 설명할 목표를 가진 물리학의 확립은, 매우 오랜 선례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말하자면 일정 부분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구상되었고, 케플러에 의해, 그리고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갈릴레이의 발견과 이론에 의해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선은 이와 같이 보일지라도, 과학 영역에서도 데카르트는 그의 선배들을 계승하는 것 이상을 실현했으며 과학자로서의 그의 독창성은 그가 과학을 바라본 철학 정신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되었다.
--- p.70
따라서 신은 현존한다. 신의 현존은 단지 새로 획득된 진리가 아니라 모든 진리의 보증이다. 데카르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명석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참이라는 규칙은 오직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완전한 존재인 신이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보증된다. 신을 입증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적용된 규칙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진실성에 의거하는 것은 악순환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였고, 데카르트는 이 점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데카르트의 설명은 비록 매우 불완전하지만 그의 설명을 토대로 우리는 그의 사유를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의 현존의 확실성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파악하게 해주는 직관을 넘어선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직관은 항상 내 능력의 범위에 있으며 동일한 대상과 함께 내 인식 각각에서 실제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의 현존의 확실성도 그것을 산출한 근거들의 명확성에 의해 충만하게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증명의 대상은 정의상 진리에 고유한 본질의 불변성을 그 자체로 지니기 때문이다.
--- p.91~92
데카르트는 이런 간접적 절차를 심리학자와 도덕가의 위대한 능력을 갖고서 분석한다. 게다가 우리는 정념이 나쁜 사용에 예속된다면 정념의 본성적 모습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좋은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모든 정념들에서, 심지어 가장 비난받을 만한 정념들에서도 그것들이 근원적으로 지닌 좋은 점, 즉 우리의 존재에 유용한 점을 비범할 정도로 섬세하게 발견해낸다. 이 점에서 우리 본성의 근원적인 선성에 대한 어떤 신뢰가 입증된다. 이로부터 우리의 자연적 현존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가꾸는 도덕이 도출된다. 이런 도덕은 데카르트 도덕의 가장 새로운 부분이지만 그는 여기에 최상의 선에 대한 도덕을 첨가한다. 최상의 선에 대한 도덕은 때때로 스토아 사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행동의 효과, 행위자의 자유, 그리고 신의 인격성에 더 많은 여지를 부여하려고 마련된 해설과 근거를 스토아 사상에 부과하고 덧붙인다.
--- p.101
데카르트의 철학은 독창성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근대의 모든 위대한 사상들이 데카르트 철학의 일면을 간직했다고 하는 것은 과장 없이 옳은 말이다. 데카르트 없는 스피노자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속하지 않는 관심과 문제를 도입했다. 또한 그는 코기토의 근원적 특성, 의식과 주체성과 자유의지의 모든 요소들을 배척했다. 그러나 기하학적 명증성의 방법론, 명확한 관념들의 합리론, 본질들의 실재론은 스피노자로 하여금 절대 존재의 통일성에 대한 범신론적 직관을 철학적 체계로 표현하도록 해준 것들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를 반박할 수 있었고 특히 그를 보완하는 쪽으로 갈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유심론적 일원론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그의 유심론적 개념을 가지게 된 것은 데카르트의 관념론 때문이 아닌가? 그가 물활론적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것은 물질세계와 모나드 세계의 이원론을 유지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에게 물질세계는 현상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칸트는 사유만으로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가 우리 인식의 조건이라는 원리는 어디로부터 그에게 온 것인가? 다른 한편, 로크는 데카르트를 공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스스로 고백했듯이 데카르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으며, 지성에 대한 분석 계획 자체는 인식의 조건에 대한 검토를 모든 철학의 출발점으로 정하는 데카르트적 영감에 속한다. 버클리의 비물질주의, 흄의 현상주의, 그리고 영국의 모든 경험심리학은 즉각적인 것은 의식의 재료이고 정신에 대한 설명은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통해 정신의 발생을 밝히는 데 있다는 전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관념에서 비롯된다.
--- p.101~102
그런데 스피노자가 단지 일종의 반골 신학자나 단순한 이단 교부가 아니었고, 또는 우선적으로 직관, 유비, 예감으로 구성된 학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설명하는 학(學) 없이는 구원하는 인식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그의 욕망을 정확히 충족할 수 있었고 그가 철학자라는 단어의 가장 충만한 의미에 맞는 철학자, 그것도 근대 철학자라면, 그가 빚지고 있는 것은 바로 데카르트다. 물론 스피노자 체계의 이런저런 부분에 대한 데카르트의 영향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데카르트가 발휘한 전반적이고도 최상의 영향이 있었고 그것은 스피노자의 정신 고유의 성향과 매우 훌륭하게 조합되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철학에서 열정적으로 포착한 것은 지성에 의해 전개할 수 있고, 감각과 상상이 도입하는 주체성의 모든 요소들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순수한 객관적 진리의 개념이다. 이는 명석판명한 관념이 순수한 객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 명석판명한 관념의 권리다. 이런 명석판명한 관념의 권리는 명석판명한 관념 외 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느낌과 의지의 주장을 축소하며, 지성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사물들의 연쇄에 대한 모든 표상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에서 이런 점을 취하고 간직하기 위해 의심, 코기토의 근원적 특성, 자유의지의 존재, 신의 초월성, 신의 자유와 창조 능력을 무시하거나 배제해야 했음이 틀림없다.
--- p.108~109
이 정도 되면 알키에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게루에 따르면 알키에는 마치 데카르트가 말하지 않은 것을 토대로 무상으로 꾸며대는 시인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알키에는 다소 짜증 섞인 어투로 항변한다. “제발 이 논쟁이 끝났으면 좋겠군요. 오늘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제게 큰 기쁨과 성과를 제공해준, 선생님과 저 사이의 아주 많은 대화가 저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또 저도 선생님을 납득시키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알키에는 몇몇 질문을 던지면서 명료하게 게루와의 해석 차이를 설명한다. 게루에게 사유의 핵심 속성은 지성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양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1부 6절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의지로서 도입하는가? 그리고 왜 그는 53절에서 지성이 사유하는 실체의 본성을 구성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철학의 원리』 1부 6절과 53절은 다음과 같다.
--- p.157
이 편지는 푸코가 나중에 사나운 논쟁을 벌였다는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고 관대한 푸코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데리다의 특강 원고가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 학술지인 [형이상학과 도덕(Revue de metaphysique et de morale)]에 실리기로 결정이 났을 때에도 푸코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약간의 뉘앙스가 감지되기는 해도 말이다. 푸코는 1963년 10월 25일의 편지에서 데리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의 텍스트가 출간되기로 한 것은 어쨌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네(내가 이기적으로 말하는 걸세). 경솔한 사람들만이 자네의 비판이 심했다고 생각할걸세.” 또한 편집이 된 원고를 읽고 나서도 푸코는 데리다의 텍스트가 “문제의 근본을 다루며 극히 근원적이고 기술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나를 아포리아에 절대적으로 빠지게 하고 또 내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사유를 내게 열어놓는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 p.190~191
결국 데카르트를 둘러싼 논쟁은 철학의 본질 자체와 철학사의 본성에 대한 문제가 된다. 알키에와 게루가 데카르트의 몇몇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벌인 논쟁은 단지 정보 교환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사건인 것이다. 동시에 철학 담론은 다양한 차원에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것을 허용하는 두께를 가지게 된다. 이 점에서 알키에의 관점은 게루의 관점에 비해 다시 힘을 얻는다. 존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은 존재의 다양한 갈래를 허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게루는 철학 체계의 외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이미 다차원성을 승인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데카르트 체계, 스피노자 체계, 칸트 체계, 피히테 체계 등은 각각 외부를 요청하지 않는 자족적 철학 체계지만, 동시에 이들 체계들의 무관계는 이미 각각의 자족성을 승인하는 다원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들 체계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은 순전히 자의적인 선택에 달린 일이 되어버린다. 다만 한 체계를 선택하고서는 다른 체계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결국 게루의 작업은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점이었던 내부와 외부의 딜레마를 다시 논점으로 부각하게 된다.
--- p.227~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