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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흐드러진 란꽃송이 2

붉게 흐드러진 란꽃송이 2

이미은 | 뮤즈 | 2017년 07월 1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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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7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552g | 140*210*30mm
ISBN13 9791104913648
ISBN10 110491364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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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 자하국의 왕 혜조는 보이지 않는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상감마마, 부디 명을 거둬주소서.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입니다. 어찌 공주마마의 부군이 되겠나이까.”
같은 말이 정확히 오십 하고도 일곱 번째 오가자, 제아무리 인자하기로 소문난 혜조라 할지라도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탁 터놓고 얘기를 해보잔 말이야. 관직을 내리는 것도 싫다, 부마가 되는 것도 싫다, 과거를 보는 것도 싫다! 재원, 자네 설마 둘째 아들을 그대로 썩힐 생각은 아니겠지.”
한 나라의 왕이 사사로이 신하의 자식 농사를 걱정함은 고개를 갸웃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신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서파의 수장, 최재원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대대로 친왕파인 최가의 자식 농사는 왕의 문제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되 할 말은 없다는 얼굴로 재원이 고개를 조아리자 혜조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방금 전까지 옥좌에 앉아 있던 이가 자하국의 왕이었다면 지금 분통을 터뜨리는 이는 딸을 가진 아비였다.
“대체, 대체 우리 공주가 뭐가 그리 모자라단 말인가!”
부모라면 매한가지일 자식 자랑도, 왕이 하면 민망한 법이다.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혜조는 방금 제가 뱉은 말에 민망함을 느끼기는커녕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뒷돈 챙긴 관리를 향해 화를 낼 때도 이보다 열성적이진 않았던 왕이다.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처럼 성을 내는 혜조의 모습에, 서 내관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서기관에게 눈짓했다. 그것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서기관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삐 움직이던 붓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멈췄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혜조는, 서기관의 손이 멈추자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서파엔 마음에 차는 이가 몇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 요 근래 동파 녀석들이 우리 공주를 채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걸 몰라 그러나! 며칠 전에도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예며 법도며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고 갔단 말일세!”
어서 내 딸을 내놓아라, 이거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혜조의 분노에 왕의 권세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동파의 수장을 떠올린 박 내관이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박 내관은 혜조의 실록을 왜곡, 변형하는 데 가장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파의 양심 없음에 기꺼이 분노했다. 길게 늘어진 소매 속에서 불끈 움켜쥐는 주먹이 옹골졌다.
그놈들은 아주 양심에 털이 나도 단단히 난 놈들이다. 세상사 이 자하국의 주인이 누구인데 감히 그 권세를 나눠 먹으려 든단 말인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실록을 조작하는 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정의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사이 가쁜 숨을 몰아쉰 혜조는 슬슬 본격적으로 딸 자랑을 시작하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네가 몰라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우리 공주가 얼마나 뛰어나냐면!”
이런, 또 시작이시로군.
서 내관과 박 내관이 서로 못 말린다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혜조의 딸 사랑은 아는 이는 전부 아는 얘기로, 얼마나 유명하냐면 대신들 사이에선 왕이 딸 자랑하는 걸 들어본 이야말로 왕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몇몇 대신들에겐 꿈같은 순간일 테지만, 설란이 태어난 뒤로 달마다 비슷한 말을 계속해 듣고 있는 이들에겐 썩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네 살 때부터 스승들이 천재라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여덟 살 때 과인을 위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수건에 봉황을 수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열두 살 때 지금 세자가 배우는 것들을 전부 뗀 아이란 말이네! 그 아이가 사내였으면…….”
두 내관과 서기관은 눈치 있게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못 들은 거다.
“-자하국의 왕이 되었을 아이란 말이야!”
대신들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혜조는 진심이었다. 세자가 있었다면 뒷짐을 진 채 허허로이 웃었으리라. 왕이 진심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아니, 혜조를 아는 모든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확신하고 있었다. 공주인 자설란이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가 자설호를 제치고 세자가 되었을 것임을.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재원은 그 사이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수많은 딸 자랑을 눈을 감은 채로도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왜? 너무 많이 들어서.
“과인이 그래도 장남을 내놓으라 하진 않지 않은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어깨를 쭉 펴고 말하는 혜조의 모습이 참으로 당당해 보여, 서 내관과 박 내관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속으로만.
그도 그럴 것이 최가가 어떤 가문이던가. 개국공신 가문에 대대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해 내는 걸로도 모자라 언제나 왕의 편에 서는 충신이었다. 게다가 현 최가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는 현재 서파의 미래라 불릴 정도로 수재였다. 어린 나이에 과거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등청해 재능을 뽐내고 있는 최지문은 세간에서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러니 그를 공주의 부마로 삼게 된다면 대신들의 원망이 끝도 없이 늘어질 게 뻔했음에도 이를 입에 담는 혜조에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뿐이랴. 왕은 주먹을 불끈 쥐곤 소리 높여 주장했다.
“우리 공주를 데려가겠다는 사내가 자하국 수도를 빙빙 돌고도 남음에도! 내! 오랜 친우인 재원 자네를 생각해! 우리 공주를 눈물을 머금고 보내겠다 이 말이네!”
되레 청하는 이가 더 당당한, 참으로 기이한 혼사가 아닐 수 없었다. 혜조의 딸 자랑에 말이 빙빙 돌았지만 결론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네 아들 내놔!’
재원은 왕의 깊고도 심오한 속내를 짐작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은 센 머리칼, 인자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두 눈엔 복잡한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그저 아들이 아까워 이런다는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 서파의 수장이자, 왕의 오랜 친우인 최재원은 반백년을 알고 지낸 혜조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얘기를 속으로 삼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한 번, 두 번. 왕과 술상을 마주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는, 그렇게 가까운 이 앞에서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등청, 혹은 가례이옵니까.”
바짝 마른 목소리에 혜조는 미간을 좁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딸 자랑을 늘어놓던 아비의 낯은 사라지고 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과인은 인재를 썩히고 싶지 않음을 말하고자 함이네. 자네도 자네야. 성인이 된 지 오래인 아이를 대체 언제까지 끼고 살 텐가.”
“그리하지 못할 연유가 있다 해도 말이옵니까.”
또다시 같은 말의 반복이다.
연유가 있다는데 그 연유가 무엇인지는 말해주질 않는다.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길고도 굵은 왕의 인내심도 한계였다. 혜조는 답답함에 성큼성큼 재원의 앞으로 걸어갔다.
재원의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는, 화를 내는 대신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낮췄다. 갑작스러운 왕의 행동에 다들 놀랄 법도 했건만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최재원이라면 흔히 있는 일이라, 하나같이 그저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할 뿐이었다. 혜조의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재원을 담아냈다.
“연유를 말해보아라. 서풍-재원의 호-, 과인은 친우의 문제를 헤아려 주지 못할 만큼 속 좁은 군주가 아니다.”
심려 가득한 왕의 목소리에 재원이 고개를 떨궜다. 왕의 손이 늙고 주름진 제 것을 꽉 붙드는 것이 약해진 마음을 잡아 흔드는 것만 같았다. 살갗을 타고 넘어오는 온기에 재원은 턱을 악물었다. 속에 묻은 얘기를 꺼내자면 시작해야 할 곳이 너무도 명백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왕가(王家)를 겨눈 날붙이인지라, 재원의 턱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원망한 적도 있었다.
매일 밤, 매일 낮 홀로 있을 때는 가슴을 치고, 왕과 마주할 때는 바짝 마르는 속을 달래며 견뎌온 세월이 그리도 길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극단적인 생각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고개를 들어 올리면 그곳에는 저를 살피는 왕의 낯이 있었다. 반백년을 알고 지낸 친우가 있었다. 재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따뜻이 저를 바라보는 왕의 두 눈이었다.
무슨 말을 하건 서기관은 그것을 기록하지 않을 것이며 혜조는 저를 문초하지 않을 터다. 또한 내관들의 입은 돌덩이보다 무거우니 말이 새어 나갈 리도 없었다. 그것을 재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이…… 실언을 했나이다.”
재원은 오늘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평생 제가 지고 가겠다 다짐한 고통을 다시금 속에 파묻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답답할 뿐이다. 자하국의 왕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진절머리가 나고 말았다. 혜조는 쇠심줄보다도 더 질긴 친우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포기했냐고? 그럴 리가. 혜조가 포기한 것은 재원의 협조를 얻는 것이었다.
“그 마음,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게지?”
“송구하옵니다.”
이렇게 된다면 최후의 수단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명령하면 그만인 일. 권력 만세인 것이다.
혜조는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곤 말했다.
“좋다. 그럼 이렇게 하지. 마침 세자의 스승 중 하나가 노쇠해 고향에 내려가 쉬고 싶다 청해 그 자리가 비게 되었다. 어명이다. 최지환은 부마가 되거나, 과거를 치르기 전까지 세자의 스승이 되어 미래의 군주를 위해 분골쇄신해야 할 것이다.”
근엄한 목소리에 재원은 참담함을 느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오랜 친우이자 주군인 자하국의 왕이, 최후의 수단을 빼든 것이다.
어명(御命).
거절할 수도 물릴 수도 없는 왕의 명령에, 신하에 불과한 재원은 한숨을 삼키며 그 명, 받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혜조의 시꺼먼 속내를 가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눈치챈 서 내관과 박 내관만이 재원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봄꽃이 막 움트는 이월.
혜조와 재원의 대화를 알 리 없는 설란은 둥근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바삐 움직이던 도아의 발걸음이 일순 우뚝 멈췄으니,
“가례야.”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설란이 무척이나 가벼운 어조로 툭 뱉어낸 한마디가 어마무시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있는 도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으나, 생각에 잠긴 설란에게 그 낯이 보일 리 없다. 툭, 툭, 턱을 괸 채 아랫입술을 두드리던 설란은 몸을 일으켰다. 말로 뱉으니 확신이 더욱 커졌다. 방 안을 빙빙 돌던 그녀는 이번에는 꽤나 비장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가례를 올려야 해.”
그 단호한 말에 도아는 슬쩍 설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 무언가 들으신 건 아니시죠, 마마?”
“듣다니 무얼?”
“아니어요! 그런데 무얼 하신다 하시었죠?”
“가례를 올려야겠다 했어. 이제 더는 힘들다 그리 말씀드려도 고려조차 하지 않으시니 출가외인이라도 되어야지 어쩌겠니.”
“마, 마마…… 설마 다짜고짜 사내 하나를 붙잡아서 도망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그럴 리가.”
그렇게 되면 왕실이 발칵 뒤집어질 일이다. 왕실뿐이랴. 아마 자하국 전역이 난리 법석을 떨 것이다. 그 정도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있어도 그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례란, 이 답답한 궁을 벗어날 방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설란은 검지로 경대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족쇄 하나를 풀고자 벌이는 일인데, 다른 족쇄를 차면 수지가 맞질 않아. 어차피 그리 머지않았을 터. 올해는 어떻게든 얘기가 나오고야 말 테지.”
“그렇지요. 성년식을 치르시니까요.”
도아는 솜씨 좋게 설란의 머리를 땋아 내리며 맞장구치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마……정녕 야반도주는 생각에 없으신 거지요?”
그리 말하는 도아의 낯에는 정말 설란이 야반도주라도 할까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설란의 행동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오는 걱정이었다. 그런 도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읽어낸 설란이 씩 웃었다.
“걱정 말래도. ……믿고 있기도 하고.”
“무엇을요?”
모든 혼사가 그렇다지만, 왕실의 혼사는 왕실 어른들의 손길 하나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백년가약을 맺을 상대부터 예식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따져 묻는지 모르는 바 아닌 설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정도는 들어주시지 않을까.”
“전하께서요?”
“그래.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 아주 작은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법도 하잖아?”
값어치를 따져 묻자면야 그녀가 해온 일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큰 소원도 아니었다. 설란은 둥근 면경 너머로 비쳐 보이는 제 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촘촘히 땋아 내린 머리칼이 그녀의 나이를 짐작케 했다. 둥근 이마와,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색이 진한 눈썹과 눈동자가 맑았다.
천생 여인의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 다른 모습이 있음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설란은 보고 있자면 제 하나뿐인 오라비가 떠오르는 얼굴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흐음…… 과한 욕심이려나.”
권력과는 먼 곳으로 시집을 가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은. 설란의 중얼거림 속에 들어 있는 본심을 알기에, 도아는 침묵했다. 쉬이 대답해 줄 수 없는 소망이었다. 머리를 땋는 도아의 손길이 느려지자 설란의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건 가례야.”
그녀의 목소리가 툭 튀었다.
“어마마마께서도 아셔야지. 이제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걸. 사실 몇 년 전부터 한계였다고. 안 그러니 도아야?”
“그럼요! 물론 세자저하께서도 어여쁘셨지만, 제 눈에는 마마께서 훠어얼씬 아름다우셨는걸요. 그걸 못 알아보는 이들이 눈이 삔 게 분명해요!”
발을 구르며 어쩜 그럴 수 있냐고 목청을 높이는 도아의 모습에, 설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아야, 너무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오히려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을 못 들은 척, 도아는 말을 돌렸다.
“어마! 생각해 보니 마마, 오늘 강연은 취소되었어요.”
“뭐? 갑자기? 어째서?”
다른 이도 아닌 공주의 강연이었다.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닌 당일, 그것도 갑작스러운 취소라니. 제 의견은 묻지도 않은 일정 변경에 설란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세한 연유를 물으려던 그녀는,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에 다른 이유를 짐작하고는 낯을 굳혔다.
“설마 또 오라버니께서…….”
“어유! 아니어요, 마마!”
눈빛으로 묻는 또 다른 가능성에 도아가 다급히 부정했다.
“그렇지. ……아니지?”
“예. 그럼요. 그쪽 일이었다면 제가 마마께 고했지요.”
“그래. 그렇지.”
설란은 금세 수긍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일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한가로이 머리를 땋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석진 곳에 버려진 궁으로 몰래 이동해 바삐 다른 치장을 하고 있었겠지.
스쳐 가는 생각에 단번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거대한 궁, 그리고 높다란 담을 벗어나기 전에는 시시때때로 온몸을 감싸는 이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든 가면을 뒤집어써야 하는 그 붕 뜬 감각. 열여덟이라는 나이에도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에, 설란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설란의 고개가 둥글게 난 창을 향하자 도아는 어떻게든 제 상전의 기분을 풀어주려 있는 힘껏 애를 썼다.
“그래도 마마, 전하께서 왕실에 진상된 망아지 중 가장 좋은 녀석을 마마께 드렸다 소문이 자자해요. 어찌나 순하고 예쁜지 궁녀 몇이 구경을 갈 정도라지 뭐예요?”
“그래. 망아지라.”
설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망아지도 좋다만, 말을 원 없이 타려면 역시 가례지.”
돌고 돌아 다시 가례 얘기다. 도아는 설란의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놓으며 다시 눈치를 봤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있을 리 없다. 도아는 살짝 내리깔아 속내를 읽기 어려운 설란을 곁눈질했다.
면경에서 살짝 시선이 비껴 나간 채 앉아 있는 설란은, 도아의 눈엔 지상에 잠시 마실 나온 선녀 같았다. 만약 도아가 설란의 또 다른 모습을 몰랐더라면 그녀는 영락없이 제 공주님이 온실 속 화초라 생각했을 터다. 그러나 외양과는 달리 설란은 쉬이 생각하면 안 되는 존재였다. 도아는 제게 주어진 임무를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는 생각했다.
우리 마마께서 정말 모르는 걸까?
그러나 도아의 비밀이 들키는 것은 단순히 시간문제였다. 도아는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절대 들키면 안 된다던 서 내관의 으름장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흐음……?”
생각에 잠겨 있던 설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례에 온 정신이 쏠려 있던 그녀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졌다.
“잠시만. 강연도 취소되었고, 내가 아는 한 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치장에 공을 들이는 것처럼 느껴지지?”
타국에서 외교사절이라도 오는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그처럼 중요한 일이라면 며칠 전부터 난리를 쳤을 테니 말이다. 설란이 의문을 제시하자 옷을 꺼내던 도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설란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것이…….”
“오호라……. 뭔가 있는 게로구나.”
“어마, 마마도 차암. 있긴 무엇이요. 아무것도 없는걸요.”
“도아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넌 거짓말할 때 위를 보는 버릇이 있단다.”
그 버릇 어서 고치래도. 설란에게 지적받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설란이 승기를 쥐자 도아는 방법을 바꿨다.
“마마, 때로는 닥치기 전까지 모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답니다. 짠! 하고 선물을 받으면 더 기쁘잖아요?”
그러니 모른 척 넘어가 달라는 도아의 말에 설란은 확신했다. 무언가가 있구나.
어떻게든 비밀을 지켜보려는 도아의 발버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란은 이상한 점을 하나하나 짚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는 걸 별로 안 좋아해. 보자, 가장 좋은 옷에, 평소보다 공을 들인 분칠에, 머릿기름까지 최고급을 썼네?”
별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이다. 설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올해 내가 열여덟이지. 성년식을 치를 때고…… 그 깐깐한 왕녀사부가 수업을 미뤄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오! 다 들켰다. 도아는 정답 근처까지 온 설란의 입을 재빠르게 막았다. 이렇게 된 이상 저라도 살아야 했다. 도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 내관을 버렸다.
“마마,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서 내관이 절대, 저어얼대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제가 마마께 어찌 비밀이 있겠어요.”
전 언제나 마마께 하늘을 우러러 숨기는 것이 없는 깨끗하고 맑은 존재랍니다. 도아의 아부에 설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그러니 제가 마마께만 슬쩍 말하는 건데요, 글쎄, 상감마마께옵서 마마의 부군을 내정해 놓으셨다지 뭐예요!”
그렇게 바라셨던 일이잖아요! 정말 기쁘지 않으셔요? 도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한껏 흥분을 표출했다.
“게다가 정말 훤칠한 분이시래요!”
“역시 그것뿐이지. 드디어 아바마마께서 팔을 걷어붙이셨구나.”
“기쁘지 않으셔요, 마마? 방금 전까지…….”
“응?”
그저 맑기만 했던 설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부마도위가 될 사내가 정해졌다, 라는 말은 그만큼의 파급력이 있었다. 부마. 가례. 이런 것들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출궁.
때로 어떤 소원들은 너무 간절히 바라서 정말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곤 한다. 설란에게 있어 출궁이란 그런 범주의 일이었다. 매일 밤, 매일 낮, 높게 둘러쳐진 담을 보며 간절히 바라지만, 정말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못했던 것.
“기쁘지.”
그 소원이 이뤄졌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저 누가 내 낭군님이 될지 궁금해 그렇단다.”
“분명 멋진 분이실 거여요!”
멋진 사내라.
“흐음.”
“마마께서 보시면 한눈에 반하실 만큼 멋진 분이실 테니 걱정 마셔요. 그리 오랜 시간을 들여 고르신 분인 걸요.”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설란도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처음 말이 나왔던 것이 보통 공주들이 가례를 올리던 열네 살 때였으니 말이다. 장장 오 년간 설란의 가례는 미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병약한 그녀를 출궁시키긴 이르다는 이유였지만, 그 속내는 아는 이들만 아는 것이었다.
가례라.
설란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에는 구름 없이 말간 하늘이 둥그런 모양 그대로 잘려 있었다.
원한 일이지 않느냐 누가 묻는다면 그녀는 기꺼이 답할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그리 바라던 일이지만, 그 과정이 기껍진 않다고. 설란은 왕녀시강원을 통해 수많은 것들을 배웠고, 개중에는 부마 간택에 대한 것도 있었다. 실제 공주들의 부마 간택 과정을 배웠기에 설란은 앞으로 제가 겪을 일들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아바마마께서 그리 오래 공을 들여 고르셨으니…… 후원에 나가면 어느 집안 영식이 우연스럽게 입궐해, 우연스럽게 백란궁 근처에서 길을 거닐고 있겠구나.”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오겠지. 어떤 사내일지는 알 수 없으나, 다짜고짜 제가 어찌나 아름다우며 어떻게 한눈에 반했는지를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표현하고자 애를 쓸 터다.
그녀는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던 과거 부마들의 첫마디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다들 그리 하는 말들이 천편일률적인지. 수년 전이나 수십 년 전이나 무작정 예쁘다 칭찬하면 모든 여자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럴 테지요.”
“그리고 다음 날은 다른 사내가, 그다음 날은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나겠지…….”
설란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가례다. 최소 살아서 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자 공주 수십 명의 삶에 대해 정리해 놓은 책자의 내용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 복잡하고도 불필요한 절차들이란.
“……야반도주가 제일 나은가?”
“마마아!”
“농이야, 농.”
“……농이 아니신 것 같아요. 진정이 섞이신 거, 맞죠?”
“그렇게 들렸니?”
“마마아- 아니시죠?”
“음…… 반쯤은?”
인생, 모 아니면 도 아니냐는 설란의 말에 도아가 그대로 뒷목을 잡았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야반에 도주하게 된다면 저를 꼭 데려가셔야 한다는 도아의 걱정 가득한 당부에 설란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말리는 것이 아니라 데려가 달라 하는 걸 보면 저 아이도 제게 물이 단단히 들어버렸다 생각하면서.
그녀는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도아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내가 제일 잘 아니 걱정하지 마렴.”
자하국 왕실의 담은 드높았고 이를 지키는 병사들은 용맹하니 공주의 몸으로 멀리 도망가는 것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나는 정식으로 출궁해 그 누구보다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생각이니. 그래서, 그 후보라는 사내가 어느 댁 영식인지는 모르고?”
“예. 서 내관도 비밀이라 하시며 입을 꾹 다물고는 얘기를 안 해주지 뭐예요.”
“평생 살 사람은 나인데, 신이 난 건 엉뚱한 이들이구나.”
설란은 낮게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괜찮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그녀는 공주였고, 부족함 없이 자랐으나 남편을 직접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부모의 권리였지, 그녀의 권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그녀에게 다행인 점은 부친인 혜조가 ‘우연’을 가장해 남편과 정을 쌓을 시간을 만들어줄 만큼은 자상하다는 것이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운명적인 만남을 만들어내는 게 정말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조 섞인 설란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도아가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맞잡았다.
“어머! 마마, 운명은 진짜 있어요! 얼마나 멋져요. 낭만적이고.”
꿈꾸는 소녀의 얼굴을 한 도아의 모습에 설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일곱 살 때부터 궁에 들어와 궁녀로 자라난 도아는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꽤 이름 높았던 가문의 넷째 딸이었다. 가세가 기운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훗날 신붓감으로 조금이라도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궁녀가 되었다기에 현실적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현실적인 얘기를 해주자니 차마 저 꿈꾸는 듯한 표정을 망가뜨릴 수 없어, 설란은 슬쩍 말을 돌렸다.
“글쎄…….”
“그럼 마마께서는 상상도 해보신 적 없으셔요?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낼 때 곁에 어떤 사내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거라도요.”
‘흐음, 사내라, 낭만적인 만남…….’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입안에서 낭만이라는 단어가 모래알처럼 꺼끌거렸다.
익숙지 않은 탓이리라.
모든 혼사가 그렇겠지만, 특히 왕실의 혼사는 정치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족의 혼사란 외교 문제나 알력 다툼에 써먹기 좋은 패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괜찮냐고 누가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어쩌겠는가. 태어났을 때부터 온갖 것들을 누리며 살았으니 몇 가지 정도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래서일까 그녀는 사랑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기대가 없으니 관심도 자연스레 사그라졌다. 바라는 것이라고는 정계와 가깝지 않은, 그래서 권력 다툼이 없을 조용한 곳에서 일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 정도일까. 날 때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다 보니 그런 것에 빨리 질려 버린 그녀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래도 오랜 친우의 들뜸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설란은 어릴 적 잠시 가졌던 이상향을 들쑤셨다.
화려한 꽃과, 사람들의 환호성, 그리고 부인들에게 주워들은 몇몇 얘기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낭만, 낭만…….’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딱히 나오는 게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에는 운명이니 뭐니 하는 것에 눈을 반짝였던 것 같은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런 때가 있긴 했었나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깜깜했다.
대충 넘어가자. 결국 설란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양이랄까.”
“예에?”
“마음이 없는 부부는 잘 지내기 어렵다 하더구나.”
“아…… 그야 그렇지요.”
“그러니 이왕이면 아무리 화가 나도 보기만 하면 노기가 사그라질 정도로 잘생긴 사내면 좋겠구나. 잘생기면 잘생길수록 좋지. 키가 크고 콧마루는 높고 얼굴은 흰 편이면서 수염은 적으면 더 좋고.”
“예에-?”
꽤나 구체적인 요구 사항들은 심지어 그림을 보고 묘사하는 듯했다. 설란은 사람은 외양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주장하는 도아의 표정에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건 아니라 말들 하지만, 날 보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잖니? 생계야 내가 얼마든 책임질 수 있으니. 그러니 기왕이면 잘생긴 게 좋지.”
그 말인즉슨, 사내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은 충분히 있다는 소리에, 도아는 우리 마마께서 이리 능력 있으시다 뿌듯해하여야 할지, 너무 색다른 반응에 울상을 지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음…… 마마, 송구하오나 잘생긴 사내들 주변에는 대부분 여인들이 많답니다.”
“물론 성격도 좋아야지. 나는 그 사내에게 지고지순(至高至純)할 텐데, 그럼 당연히 그쪽도 지고지순(至高至純)해야지.”
그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설란의 말에 도아는 쌓이는 걱정을 덜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폭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어여쁜 공주님이 실망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과한 걱정을 하며 도아는 한 번 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는 한 그런 완벽한 남자는 없었다. 있더라도 혼약자 없이 아직까지 혼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 여린 궁녀는 조심스레 제 걱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마마…… 그것 외엔 또 없으시어요? 왜, 여인들에게는 특별한 획이 있잖아요.”
“특별한 획?”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설란의 표정에, 그새 신이 난 도아가 입꼬리를 들썩이며 설명했다.
“예. 여기, 여기에.”
콕콕 심장을 가리키며 도아는 말을 이었다.
“콕 박히는 것들 있잖아요. 이를테면 연서 끝에 꼭 ‘보고 싶다’고 써준다든지, 힘들 때면 말하지 않아도 눈치채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 준다든지…….”
어째 점점 누군가의 실제 경험담 같은 얘기에 설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제게 어떤 남자가 좋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건 조금 흥미가 생긴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난 소꿉동무가 사랑에 빠진 것이라면 응당 그 상대가 괜찮은 놈인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정신머리가 썩어 빠진 놈이라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무시무시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설란은 슬쩍 운을 띄웠다.
“대체 누구일까? 그렇게 해주는 사내는.”
“어머, 그렇지요, 마마? 그게 요새 궁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소설이온데…….”
소설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설란의 눈에서 흥미가 사라졌다. 연정을 품은 정인이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만 소설이라니. 김이 팍 새서, 설란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소설은 관심 없어. 그리고…….”
잠시 상상하던 설란이 미간을 찡긋거렸다.
“내 부군 될 이가 연서를 보내면 뭔가 이상하잖아? 그런 건 보통 혼례를 치르기 전에 하는 거지, 혼례를 다 치르고 난 뒤에 하진 않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난 정인이 생길 수가 없거든.
설란의 말에 그제야 도아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하국의 공주님은 연애고 결혼이고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애당초 모든 것이 엄밀히 통제되는 궁 안에서 제대로 된 정인을 만들 수 있을 턱이 없다.
괜히 공주를 궁 안의 꽃이라 칭하는 게 아니다.
벽을 높이 쌓고 안전한 곳에서 홀로 고고히 피어 있기에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에서 지켜지지만,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하는 높디높은 곳에 홀로 외로이 피어 있는 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왕실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기에 도아의 공감은 더욱 깊었다. 그녀는 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말들을 마구잡이로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아! 마마, 이건 어떠셔요? 왕녀시강원에서 마마께옵서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글귀를 좋아하는 사내라든가, 시문을 즐겨 읊는 사내라든가…….”
글귀? 시문?
설란은 걱정스레 제 친우를 바라봤다. 궁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어찌 좋아하는 것들이 고리타분한 양반들과 딱 닮았다 싶어서. 언제 한번 날을 잡아 소녀 감성을 끌어올릴 나들이라도 가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며 설란은 조용히 손을 뻗어 도아의 양손을 그러쥐었다.
“도아야.”
“예, 마마.”
“물론 둘 다 글과 시문을 좋아하면 좋겠지만, 글귀와 시문은 굳이 둘이 즐길 필요가 없단다.”
“……예?”
“옛 성현들의 말은 나 홀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그걸 굳이 반려자와 같이 즐길 필요가 뭐 있니. 게다가 부마가 될 이가 글과 시에 관심이 많다? ……글쎄. 그렇다면 그이는 행복해지긴 어렵겠지.”
씁쓸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부마도위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범주는 한정되어 있다. 글도, 성현도, 시문도 좋아한다면 분명 제 실력을 펼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할 터다. 애당초 그 정도로 재능 있는 이가 부마로 선정되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 생각하는 설란의 낯이 무거웠다. 그것을 어찌 해석했는지, 도아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설란을 재촉했다.
“아이, 마마. 그러시지 마시고, 하나는 있을 거예요. 찬찬히 생각해 보셔요.”
도아의 간청에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겨우겨우 한 가지를 입에 올릴 수 있었다.
“음…… 글쎄…… 굳이 고르자면, 기방?”
“기방이요?”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되물음에 설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기방. 하루가 멀다 하고 기방에 들락거리지만 않는다면 솔직히 외모건 시문이건 나머진 다 좋을 것 같은데.”
반짝반짝한 연애담에서 현실로 끌려온 도아의 얼굴에서 발그스름함이 싹 사라졌다.
“기방…… 에휴. 맞아요. 사내들은 왜 그리 기방을 좋아하는지. 저잣거리에만 나가도 기녀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사내들 천지라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그것만 빼면 어떤 사내든 대충 살 부대끼며 살 자신은 있어. 마음도 주고. 서로 날을 세우고 사는 것도 피곤하니.”
“어마! 자하국의 공주마마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당연히 상감마마께옵서 최고로 멋진 사내를 콕 집어주실 텐데!”
‘멋진 사내’와 ‘사랑’ 사이에 그다지 큰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설란은 이내 설명을 포기했다. 애당초 둘 다 태어나 연애 한 번 못 해봤으니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도 저어한 일이라, 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지. 아바마마께서 고르는 사내는 그럴 테지.”
그 기준이 나와는 조금 다를 테지만.
설란이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자, 도아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주위에 괜찮은 사내도 없고. 요새는 시집가지 말고 평생 마마 곁에 붙어 있을까 생각 중이라니까요.”
“후후후. 언제든지 환영이야. 내 평생 먹여 살려줄 테니 내게 시집오련.”
“어머, 정말이지요? 마마께선 아무리 멋진 부군을 만나셔도 절 안 잊으실 거지요?”
톡톡, 설란의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르며 도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듯 설란이 과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으럼! 널 잊다니, 절대 안 그러겠지만 만약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면 정신을 놓은 거니 옆구리를 꼬집어 버리렴.”
남들 앞에서는 절대 못 할 말들을 종알거리는 동갑내기 두 여인에게선 십년 넘게 쌓아온, 신분을 초월한 우정이 엿보였다. 이내 숨넘어갈 듯한 웃음으로 대화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설란의 치장도 끝이 났다.
‘어머머!’
설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아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감탄을 꿀꺽 삼켰다. 도아가 처음 설란을 모시기 시작한 것이 여덟 살 때였다. 그 시절 ‘자설란’으로 이름 붙여진 공주님은 툭하면 아파서 체구가 작고 항상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러니 자하국의 쌍생아 공주는 병약해 자리보전을 한다는 소문이 영 근거 없는 헛소문은 아닌 셈이다. 어린 공주가 쉼 없이 잔기침을 뱉을 때면,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희다 못해 퍼렇게 질려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곤 했으니 말이다.
‘모든 걸 알았을 땐 정말 놀랐었지.’
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설란을 눈에 담았다.
“어때?”
설란이 다홍색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묻자 도아는 그 물음만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마. 상감마마께옵서 어떤 도령을 마마의 부군으로 간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마께 첫눈에 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반편이일 거여요.”
빈말이 아니라 지금 설란은 자하국의 꽃이라는 칭호가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도아의 호들갑에 설란이 활짝 웃자 단어 그대로 활짝 핀 한 송이 꽃을 보는 것 같았다.
칭찬이 달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설란 역시 인간인지라, 아름답다는 얘기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아는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정말이지, 마마께선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지신다니까요.”
제가 쫓아가기 버겁다며 도아는 귀엽게 눈을 흘겼다. 끊이지 않고 찬양이 이어지자 설란은 어지럽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도아는 양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더욱 강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어머, 아니에요, 마마. 여자인 제가 봐도 반할 정도로 고우시어요!”
“다 네가 치장해 준 덕이지. 아, 그래. 내 상이라도 내려야 할 듯한데, 일전에 서역에서 들여온 은빗은 어떠니? 잘 어울릴 것 같아.”
상 내리는 것에 아낌이 없는 공주의 말에 도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머…… 아니어요, 마마.”
칭찬과 겸손의 주고받음은 장지문 밖에서 다른 궁녀가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릴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장지문 밖에서, 설란을 모시기 위해 서 있던 서 내관이 괜스레 민망해 온몸을 비튼 것은 둘은 절대 알지 못할 일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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