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한 것은 나무를 통해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드러내는 공부를 위해서였다. 선비들이 유독 매화를 사랑한 것은 매실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_ 30쪽, 〈제1부_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봄나무에게 선비정신을 배우다〉
조임도는 배롱나무를 심어 붉은 꽃 사이로 부모의 묘소를 보는 것을 자식의 도리라 생각했다. 배롱나무 꽃은 100일 동안이나 피니, 꽃이 질 때까지 부모의 묘소를 바라보는 조임도의 심정도 붉게 물들 것이다. 배롱나무는 붉은 태양을 벗 삼아 꽃을 피우고 또 떨어뜨리길 반복하면서 미래를 밝힌다. 조임도는 집을 마련한 뒤에 ‘곡굉曲肱’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팔베게하고 누워 배롱나무의 꽃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부모의 묘소를 바라보았다. _ 105쪽, 〈제2부_생기로 가득 찬 여름나무에게 지속성을 배우다〉
조선시대 누각과 정자 주변의 연꽃은 시에도 등장하듯이 군자 혹은 선비의 정신을 상징한다. 연꽃을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만든 사람은 중국 북송시대 염계濂溪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이다. ‘연꽃을 사랑하는 이야기’라는 뜻의 이 글이 등장하면서 중국 사람들은 물론 조선의 선비들까지 하나같이 연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주돈이의 작품이 등장하면서 연꽃은 불교의 상징만이 아니라 성리학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주돈이가 연꽃을 극찬한 것은 진흙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 있는 연꽃의 자세 때문이었다. 선비들은 연꽃처럼 속세에 더럽히지 않고 살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_ 126, 127쪽, 〈제2부_생기로 가득 찬 여름나무에게 지속성을 배우다〉
곽종석이 산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세상을 등진 삶이 아니라 난국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비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곽종석은 비굴하게 ‘맹자 왈, 공자 왈’을 외우는 나약한 유학자가 아니라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의 특성처럼 세상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실천한 선비였다. 나는 곽종석의 삶에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승강柔勝强’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_ 179쪽, 〈제3부_바람을 견딘 가을나무에게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다〉
윤선도의 다섯 벗은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이다. 다섯 벗 중에서 나무는 소나무와 대나무다. 사물을 벗으로 삼는 것은 곧 사물에 대한 인격화 과정이다. 사물에 대한 인격화는 성리학적으로 보자면 ‘공부’에 해당한다. 성리학의 공부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기 때문이다. _ 291쪽, 〈제4부_변함없이 고고한 겨울나무에게 지조를 배우다〉
차나무를 만나는 일은 단순히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선비정신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선비정신은 자신을 위하는 일이 곧 천하를 위하는 일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세다. 손관이 굳이 차나무를 가져온 것은 이 나무의 특성과 자신의 생각을 맞추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나무는 옮겨 심는 것을 꺼린다. 딸을 출가시킬 때 부모가 차씨를 주는 것도 변함없이 시댁에서 잘살길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