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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해양사론

여수해양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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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10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74쪽 | 148*210*30mm
ISBN13 9788975988561
ISBN10 897598856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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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주변에 마음이 먼저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몸담고 살아가는 고장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그와 매한가지이다.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지난날을 돌아보고 오늘을 되새기며 앞날을 가늠하려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그것이 고장을 넘어 제 나라와 겨레 그리고 인류로까지 번지어가는 게 바람직스럽다 함은 이를 나위가 없다. 미흡한 채로나마 麗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고장의 과거를 더듬으며 그 역사를 훑어보고자 나서기에 이른 배경이다.
이 책은 여수지역의 역사를 바다와의 관계 속에서 검토한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지역마다 제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니게 마련이거니와, 여수의 경우 그 중에서도 해양적인 특성이 도드라지는 고장에 속한다. 전통시기의 여수는 한국 해양의 역사에서 자못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지역이었다. 선사시기의 유적에서 이미 바다 너머의 지역과 문물을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나타난다. 뒤이어 백제와 가야세력이 왜와 통교한다든지 혹은 통일신라가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하며 해상진출을 시도하던 교두보이자, 신라말기에서 고려의 초엽에는 사서에 이름을 남긴 유력한 해상세력가의 활동거점이었다. 또한 고려말엽 들어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를 막아내던 주요한 기지였고, 海禁政策을 시행하던 조선시기에는 해양수호의 핵심 근거지였다. 해상활동이 활발하던 시기 해양진출의 발판이자 海禁에 당해서는 해양수호의 요충이었던, 이를테면 한국 해양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고장 가운데 하나가 여수지역이라고 하여 지나친 말이 아닌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여수 해양의 역사 중 대체로 조선전기까지 다룬 글들을 모아 보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후기까지 논급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주요 내용은 대략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믿는다. 그 이후의, 가령 전라좌수영을 포함하여 조선후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몇몇 주제는, 별도의 저술에서 순차적으로 검토해갈 예정이다. 계획한 연구를 모두 마쳐 여수지역의 역사를 바다와의 관계 속에서 개괄 조망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려 마지않는다.
지역사는 자체만으로 존재의의를 지닌다. 지역사회가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이치에서이다. 중앙과 지방의 차이 없이 그러해 마땅하다. 그렇지만 연구 현장에서 지역사가 실제 그런 대접을 받는 경우란 별로 흔치를 않다. 중앙 중심의 전체사에 가려 설 땅조차 찾지를 못하는 게 현실이 아닌가 싶다.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이해한 지역사, 더욱이 지역주민에 의해 이룩되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전체사인 한국사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그려진 지역사를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앙과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또한 그에 종속되지도 않은 채 나름의 의미를 지니는 가운데 한국사의 흐름에서 일정한 구실을 담당한 지역사, 최소한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며 바라본 지역사를 서술하는 게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따름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이 그러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현전하는 자료를 중심으로 글을 쓰다 보니, 대세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지역사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정된 좁은 지역의 역사를 다뤄야 하는 사정상 주제에 따라서는 불가피하게 겹쳐 서술된 내용도 눈에 띈다. 여러 모로 한계가 많은 저술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서둘러 출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무엇보다 제 고장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수많은 사실들이 진실인 양 운위되고 믿어지는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층 강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 굳히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그러한 소망의 싹이 자라서, 격심한 중앙 편중의 해소를 비롯하여 지역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작은 계기라도 마련되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는다.
여수지역을 대상으로 글을 써온 지 어언 3년이 다 지나간다. 느지막이 나톤 인연의 도타움에 새삼 놀라거니와, 그 씨앗이 오랜 잠에서 깨어 눈을 틔게끔 배려하고 이끌어주신 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姜貞埰 선생님께서는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를 설립하시어 이 책이 저술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셨다. 학교와 지역을 남달리 사랑하시며 인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쏟으시는 선생님의 높은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항상 죄를 짓는 심정이다. 불민한 저자에게 격려로 일관하시는 선생님의 깊은 사려를 떠올리며 게으른 몸을 채근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李三魯 선생님과 宋淨民 선생님, 李鐵 선생님께서는 연구튼 설립이 처음 논의되던 때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저자를 든든히 받쳐주는 버팀목이시다. 金塘澤 선생님께서 베푸신 은덕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처음 학문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해주신 것을 시작으로 저자의 공부에서 신상의 문제까지 모두가 선생님의 걱정거리였다. 못난 제자임에도 사랑을 아끼지 않으신 선생님의 보살핌에 힘입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아울러 전남대학교 사학과와 역사교육과의 교수님들을 위시하여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분들의 도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거니와, 더욱이 힘든 길을 함께 걸으며 외로움을 나눈 연구소 식구들의 고마움을 기억해두고자 한다. 신설된 연구소에서 으레 부닥치게 마련인 온갖 궂은 일들을 제 일인 양 감당하며 묵묵히 헌신한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은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盧時勳 교수와 宋銀日 선생, 신아름 선생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2010년 10월
국동항 서실에서
저자----저자 서문 중에서

Ⅰ. 전통시기 韓中·韓日 海上交流와 麗水


머리말
1. 해상교류와 함께 열린 여수역사의 여명
2. 백제·가야의 여수 진출과 해상교류
3. 신라말 고려초의 해상교류와 여수
4. 해상활동의 통제와 해양수호기지 여수
맺음말

머리말
인류의 역사에서 바다를 제패한 자는 곧 세계를 지배하였다. 한국의 역사에서도 바다의 중요성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한국은 선사시대 이래로 동북아의 해상교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해권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초의 ‘해상상업왕국’을 건설했던 張保皐의 존재가 그것을 웅변한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해상을 통제하려 들면 들수록, 특히 조선왕조가 海禁政策을 강력히 시행하면서, 해상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바다를 멀리하는 풍조가 점점 강해져 갔다. 조선의 패망과 일제의 침탈을 부른 주요 요인 중의 하나였거니와, 해방 이후 해양의 문호가 열리면서 이제 한국은 해양강국·무역대국으로 성장하여 개방화·세계화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였듯이, 한국도 또한 바다를 가까이 하며 해양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때 진취적으로 발전하였고, 반대로 바다를 멀리하며 해양활동에 소홀하면서는 안으로 움츠러들기만 하며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해양사와 해양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호남지역은 해상교류의 주요한 거점인 동시에 기나긴 해안선과 수많은 섬을 보유한 해양문화와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전근대시기 동북아 물자교류와 해상교통의 요충이자, 진취적인 여러 해상세력의 활동무대였으며, 선진문화를 수용·전파하는 길목이었다. 백제는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류를 통해 문화예술의 금자탑을 쌓았고, 또 그것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해상왕’으로서 한국해양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여수반도 일원에서는 朴英規나 金?과 같은 해상세력가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당시 호남지역은 한·중 문화교류의 주요 창구로서, 거의 모든 禪僧들이 귀환 상륙하여 한국의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우도록 씨앗을 뿌린 고장이었다. 또한 고려말 왜구를 격퇴하는 데는 鄭地와 그 휘하의 전라도 수군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임진왜란 때 李舜臣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의 상승대첩으로 계승되었다. 그 외에도 하멜과 여수의 관계라든지, 혹은 해양제국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이나 한국 최초의 해양수산교육기관인 여수공립수산학교의 설립 등, 전통시기에 호남지역은 한국해양사의 중심에 선 고장이었다고 하여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러한 호남지역 중에서도 여수는 더욱이 해양사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고장이었다. 섬을 포함한 여수반도 일원의 선사시기 유적에서 이미 해상교류의 증거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뒤이어 백제·가야세력이 倭와 통교하고 또한 통일신라가 중국·일본과 교류하며 해상진출을 시도하던 교두보였다. 신라말 고려초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해상세력가들의 활동 거점이었고, 고려말 왜구를 방어하던 주요 기지이자 해금정책을 시행하던 조선시기 해양수호의 근거지였다. 해상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의 해양진출 교두보임과 동시에 海禁에 당해서는 해양수호의 요충이었던, 말하자면 한국 해양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될 주요 거점 중의 하나가 여수지역이었다고 하여 지나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여수지역의 해양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해 나가되, 근대 이전으로 한정할 생각이다. 여수반도 일원을 근거로 이루어진 해상교류의 역사를, 전통시기 그 중에서도 대략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초기까지만으로 제한하여 살피려 한다. 그 이후는 장차 별도의 글에서 검토할 기회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1. 해상교류와 함께 열린 여수역사의 여명
여수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신석기시대부췅였다.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인이 살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웃 순천에서 구석기 유적지들이 여럿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그러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로는, 신석기시대 前期의 유적이 여수지역에서 발견된 인간의 자취 중 가장 오래 된 예에 속한다. 가령 突山島 앞의 松島에서 조사된 조개더미[貝塚] 유적과 같은 것이 그러하였다. 함께 발굴된 집자리터 아래에서 나온 숯 조각을 방사성탄소연대법으로 측정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송도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신석기 전기부터 가장 늦은 단계에 이르는 유물들이 나왔다. 또한 가까운 金鰲島의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여수지역의 일부 섬에서 유적의 겉에 드러난 부분만을 조사한 결과, 송도 조개더미 유적에서 나온 것과 ?슷한 유물들이 수도 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석기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이르도록, 여수지역에는 인간이 계속해서 거주하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물가[水邊]에서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신석기 유적들이 늘 바닷가나 냇가에서 발견되는 이유이다. 여수의 송도나 금오도를 비롯한 섬들에서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다수 발견된 것도 그와 매한가지 현상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수지역의 역사를 연 그러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해상을 통한 문물교류와 전파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남해안의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동해안이나 서해안 지역과 연결되는 석기와 토기들이 수두룩하게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기잡이 연모인 이음낚시는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사한 양식의 것임이 밝혀졌다. 黑曜石으로 만든 연모는 그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 큐슈지역에서 나온 원석을 가공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흑요석으로 만든 일종의 작살로 이해되는 톱날 모양의 석기[石鋸]는, 남해안의 일부 신석기유적을 비롯하여 특히 일본의 큐슈지역에서 다수 출토된 사례가 전한다. 여수역사의 신새벽이 신석기시대의 해상교류를 배경으로 열리었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다.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도 현재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신석기시대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교류는 오직 바다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여수지역에서 출토된 바 일본과의 교류를 암시하는 신석기 유물들도 그러하였을 것임은 이를 나위가 없다. 이음낚시이건 흑요석이건 그 모두가 해상을 통한 문물교류와 전파의 흔적을 보여주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신석기시대가 여수 역사의 여명기인데, 그것이 해상교류와 함께 트인 새벽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농경이 주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에 따라 인간의 거주지도 물가에서 내륙의 구릉지대로 옮겨갔다. 아울러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농경의 일반화에 힘입은 생산력 증진의 덕택이었다. 여수지역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청동기시대의 중심 유적들이 대체로 섬이 아닌 여수반도에 위치하는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유적 분포의 범위나 밀도에서도 신석기시대를 훌쩍 넘어선다.

예컨대 고인돌이 그러하였다. 고인돌은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전남지역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도드라져서 청동기시대의 지표가 되는 유물로 으레 거론된다. 그런데 여수지역에서는 이 고인돌이 대체로 육지인 반도에 위치한다. 수많은 섬들 가운데 유독 돌산도에서만 고인돌 무리가 발견된다. 비교적 큰 섬이어서 육지나 마찬가지로 넓은 평지를 가진 때문이었다. 여수지역의 고인돌은 또한 조사된 것만 1천여 기에 달한다. 미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적지 않으려니와, 자못 조밀한 분포라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상당한 숫자의 인구가 구릉지대에 밀집해 거주하면서 농경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게, 청동기시대 이 고장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여수지역을 한반도 남해안 청동기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는 게 반드시 지나치지만은 않아 보이는 까닭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도 여수지역의 해상교류는 여전히 활발하였다.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수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해상을 통한 문물교류와 전파의 흔적이 나타난다. 가령 고인돌의 껴묻거리[副葬品]로 나온 琵琶形銅劍이나 銅?와 같은 것이 그러하였다. 여수의 한 유적에서 8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는데,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그 예가 없는 일이었다. 중국 遼寧地域의 초기 청동기 유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발굴 성과였다. 여수지역의 청동기문화가 내륙지방을 건너뛰어 멀리 遼河나 대동강유역의 그것과 직접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해상교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로서, 청동기시대에도 여수지역에서 해상을 통한 문물교류가 끊임없이 행해졌음을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한편 이 즈음 여수지역에서는 초보적이나마 국가의 모습을 갖춘 정치적 단위체가 등장하였다. 청동기시대에 처음 출현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국가의 초기형태가, 여수지역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무리지어 촘촘히 분포한 고인돌이라든지, 혹은 보기 드물게 풍부한 청동제 유물의 존재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馬韓의 54개 小國 중 하나인 爰池國이 여수에 위치했으리라는 견해도 또한 그것을 뒷받침한다. 해상교류에 의해 일궈진 화려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여수지역에서 초기국가가 태동하였는데, 뒤이어 철기문화가 도래하고 마한연맹이 성립하면서 이제 그것을 구성하는 한 작은 나라로 역사의 전면에 그 얼굴을 내민 격이었다.

삼한시기에도 여수지역은 해상활동의 유력한 근거지뒿다. 이 무렵 철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먼 거리의 지역 사이에도 물자교류가 자못 활발해졌다. 동북아에서의 물자교류는 대개 해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상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해상교류는 으레 연안항로를 이용하기 마련이었다. 당시의 造船이나 항해술의 수준으로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연안항로에서는 지리적인 위치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중·일 세 나라의 중심에 자리잡은 한반도가, 동북아의 해상교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가령 고조선은 대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연안항로를 장악함으로써 국가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남쪽의 韓이나 倭가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가로막은 채 물자교류를 중개하여 이득을 챙기는 식이었다. 이를 불만스럽게 여긴 중국 漢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패망하고 한 군현이 설치되기에 이른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따라서 한의 군현이 해상교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하였다. 帶方郡에서 출발하여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 쓰시마에 이르는 항로가 중국의 正史에 실린 것은, 그 하나의 작은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대방)군에서 倭에 이르려면,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야 한다. 韓國을 거쳐 잠시 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왜의 북쪽에 있는 狗邪韓國에 도달하는데, 거리가 7천여 리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바다를 건너기 1천여 리이면 對馬國에 이른다.

대략 3세기 무렵의 항로를 묘사한 내용이다. 오늘날의 황해도 일대에 위치하던 대방군에서 일본을 향해 바닷길을 출발하면, 우선 韓國을 거치게 된다고 한다. 마한연맹의 중심인 目支國으로서, 충남 직산 부근의 바닷가인 아마도 아산만 일대를 가리키는 듯 보인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항해하다 끝자락에서 다시 동쪽으로 배를 돌려 가다 보면 구야한국 즉 金官加耶인 현재의 김해에 도달하는데, 거기에서 비로소 한바다를 건너 쓰시마에 이른다는 것이다.

삼한시기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의 세 나라가 펼치던 해상교류의 유일한 통로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으로 내려가다 다시 동으로 항해하여 김해에 이른다고 하는, 그 동쪽 방향의 연안항로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 게 곧 여수반도이다. 당시 한·중·일 삼국의 해상교류에서 반드시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될 항로상의 요충에 여수가 자리하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지리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여수지역이 해상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여건이 갖춰진 셈이었다.

삼한시기 여수지역에는 마한연맹을 구성하는 한 소국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유력한 정치적 단위체가 자리하였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여수지역의 이 정치적 단위체가, 위에서와 같은 연안항로를 이용한 동북아의 해상교류에 개입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지리적인 이점을 배경으로 해상교류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이 정치적 단위체가 성장해갔음이 분명하다. 여수의 거문도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중국 漢나라의 화폐가 그 증거이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중국 漢代의 화폐는 상당수에 이른다. 중국의 군현이 위치하던 북부를 제외한 남부에서만도 17개소에서 1,043점이 나왔다. 대부분이 바닷가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화폐의 종류에는 半兩錢과 五銖錢 및 貨泉·貨布·大泉五十 등이 있다. 이들 한대의 화폐가 애초에 무슨 용도로 한반도에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얼핏 국제교역에서의 결제수단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다만 그와 같이 한반도의 바닷가에서 출토된 한대의 화폐가, 적어도 기원전후에서 2∼3세기까지의 동안에 한국과 낙랑 등 중국 군현 내지는 중국 본토와의 사이에 활발한 해상교류가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여수 거문도에서는 그와 같은 한대의 화폐 가운데 오수전만 980점이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한대 화폐 전체의 94%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처럼 많은 수량의 중국 화폐가 나왔다고 하여 반드시 이 지역이 당시 해상교류의 핵심 요충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거문도 서도리의 뒷개인 큰이끼미 바닷가 모래밭에서 한꺼번에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아마도 어느 난파당한 선박에 실렸던 게 통째로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출토된 화폐가 통용되었다고 하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혹은 그보다 약간 늦은 3세기 어느 때까지의 사이에, 그처럼 다량의 중국 화폐를 실은 배가 여수 앞바다를 왕래하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지리적인 위치나, 혹은 중국 군현 내지 본토와의 직간접적인 교역에 종사했을 법한 그와 같은 선박의 존재로 미루어, 삼한시기 여수지역에서는 해상세력이 활동했던 것으로 간주하여 좋을 듯싶다. 해상교류에 참여함으로써 성장한 정치적 단위체쟀 존재가 상정되며, 그것이 곧 마한연맹을 구성하는 한 소국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역사가 열린 신석기시대 이래 여수지역에서는 해상교류가 꾸준히 행해졌다. 그리고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그와 같은 해상을 통한 문물교류를 바탕으로, 이제 국가의 형태를 갖춘 정치적 단위체가 여수지역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해갈 수 있었던 셈이다.

2. 백제·가야의 여수 진출과 해상교류
삼한 중의 마한에 속하던 여수지역은 삼국시기 들어 종당에는 백제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를 않았다. 일시에 백제의 권역으로 편입된 게 아니었다. 몇몇 단계를 거치면서 순차적으로 백제의 통치력이 여수지역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가야세력의 여수 진출과 맞물려 진행된 일이기도 하였다. 자못 복잡해서 쉬이 종잡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문헌상의 기록이 빈약한데다, 그나마 고고학적인 발굴성과와도 꼭 일치하지만은 않음에 따라 야기된 현상이다.

여수지역이 간접적으로나마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일러야 4세기 후반이었다. 일본 측의 기록을 조심스럽게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근초고왕 24년(369)에 倭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한 백제가 오늘날의 전남지역에 마지막 남은 마한세력을 정벌하고자 나섰다고 한다. 백제가 가야를 끌어들이고 왜군의 협조를 받아 마한의 잔여세력을 복속시킨 사실을 가리킨다. 아울러 그 군사적 진출의 방향이 ―아마도 여수를 포함한― 전남의 동부지역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향했다고도 한다. 전남 내에서도 여수지역에 보다 일찍이 백제와 가야의 영향력이 미치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4세기 후반 즈음이면 백제와 가야세력이 벌써 여수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이해하여 좋은 셈이다.

그런데 고고학적인 연구에서는, 전남지역에서 나온 백제계 유적과 유물의 상한을 5세기 후반에서 심지어는 6세기 중엽까지로 보기도 한다. 아무리 빨라야 5세기 중반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문헌에 의거한 연구와 1세기 전후 혹은 그것을 훌쩍 넘어설 만큼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 한편 가야계의 경우 최근 순천지역에서 잇따라 관련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4∼5세기 무렵 및 5세기말∼6세기초엽의 유물이 나왔다. 앞선 시기의 것이 小伽倻 계열이고 보다 뒷 시기의 것은 大加耶 계열로 이해들을 한다. 백제에 앞서 소가야가 먼저 순천 등 전남 동부지역에 진출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시기 또한 문헌상으로 백제의 영향력이 전남지역에 미치기 시작했다는 바로 그 즈음에 해당한다.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이, 먼저 소가야 계통의 영향을 받다가 뒤이어 백제와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고 최종적으로 백제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는 의미이다.

여수지역에서 나오는 관련 유물들도 대략 그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근자에 발굴된 유적에서 5∼6세기대로 여겨지는 백제와 가야계의 유물이 나왔는데, 백제보다는 가야계가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라는 평가이다. 아울러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倭系의 유물도 눈에 띈다고 한다. 여수지역의 경우 아직 그 사례가 충분치 않은 편이라서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관련 유적과 유물로 미루어, 백제와 가야세력의 영향권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추이에서 순천을 위시한 전남 동부의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음이 거의 확실하다.

문헌에 의거한 연구와 고고학적인 성과를 종합하면, 대략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이르는 사이에 백제의 전남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단계적으로 확립되어 간 듯 보인다. 백제의 편에 선 가야의 영향력도 그와 함께 전남 특히 그 동부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갔으며, 아울러 그에 협조한 왜의 경우도 대체로 그와 비슷하였으리라 판단된다. 백제에서는 흔히 처음 정복한 지역의 토착세력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단지 그들로 하여금 貢納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그와 같은 간접지배를 넘어서 거점지배 방식의 ?魯制를 시행한 것이 5세기 후반이었으며, 6세기 중엽의 聖王代에 가서야 郡縣制에 의한 직접지배를 달성하였다. 4세기 후반에 처음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전남지역이, 150여 년 뒤에야 그 직접지배 영역으로 흡수되기에 이른 경위는 그러하였다.

특정한 유물이 만들어져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대와, 제작방법 등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이 처음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기와의 사이에, 다소의 시차가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또한 무덤이 그러하듯이, 보수적 색채가 매우 강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바뀌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백제가 전남지역으로 처음 진출을 시작한 게 4세기 후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이 유적과 유물에 반영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세월을 필요로 하였음이 틀림없다. 직접적인 영향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하였을 간접지배의 시기나, 혹은 영향이 있더라도 한계가 컸음이 분명한 거점지배의 기간이라면 더 이를 나위가 없다. 백제의 진출이 시작된 4세기 후반 이후 한참이 지나도록 전남지역에서 백제계 유물이 찾아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거점지배 방식이 시행되는 5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이 지역의 토착세력에 의해 사용된, 백제의 영향을 받은 돌방무덤[石室墳]이 나온다. 뒤이어 백제의 직접지배가 시작되는 6세기 중반에 들어 백제식 그대로의 돌방무덤이, 그리고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엽의 사이에 백제계 산성이 전남지역에 나타난다. 백제의 영향력이 차츰 확대되어가는 데 발맞춰, 다소의 시차를 두고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순차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한편 여수나 순천과 같은 전남 동부지역의 경우, 삼한시기 이래 변한 내지 가야 계통과 끊임없이 오가며 교류를 지속하였다. 중국 군현에까지 공급되었다는 변한의 鐵도, 여수지역을 거쳐 한반도 북부로 해상 운송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처럼 일찍부터 가야계통과 교류 중이던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 백제가 손길을 뻗쳐 왔다. 가야를 끌어들이고 왜군의 협조를 받은 백제가 여수지역에까지 정치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4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여수와 순천지역에서 백제보다 앞서는 가야계통의 4∼5세기대 유물이 먼저 나오고, 그 뒤를 이어 5∼6세기대의 백제나 가야 혹은 왜 계통의 유물이 나타나는 것은, 그와 같은 사정에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다.

이후 여수지역은 백제와 가야세력의 대외교류 창구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였다. 가야가 백제와 교류한다든지 혹은 백제가 가야로 진출하고 또 왜와 교류하는 데, 여수지역은 거의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위치였다. 더욱이 5세기 전반에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일부 세력이 고구려군을 끌어들인 신라에 의해 타격을 받으면서 그 비중은 한층 커졌다. 백제와 가야가 낙동강 하류지역을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이용하기 어렵게 되면서, 여수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 사이의 교류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편 5세기 후반 들어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일시 대가야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고구려의 강한 압박으로 백제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데 따른 일이었다. 전남 동부지역에서 퇴조를 면치 못하던 백제의 자리를 대가야세력이 메운 격이었다. 낙동강을 대신해서 섬진강을 대외교류에 이용하고자 했던 대가야에게, 순천과 여수반도 일대는 외면하기 어려운 요충이었다. 이 지역에서 잇달아 나타나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걸치는 대가야계의 유적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수지역이 그처럼 대가야의 대외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체제를 정비한 백제가 6세기 전반 들어 다시 전남 동부지역으로 진출해 왔다. 그리고 왜군의 협조를 받으면서 섬진강 넘어 대가야 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6세기 중반에 성왕이 한강유역 탈환작전을 펼치면서 대가야를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세력확대의 결과였다.

한편 여수지역이 백제의 직접지배 영역으로 흡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성왕대에 군현제가 시행되면서였다. 여수반도 일원을 통치하도록 설치된 것은 두 고을이었다. 5방 중의 南方에 속하는 ?平郡(현 순천) 관내의 猿村縣과 突山縣이 그것이었다. 청동기시대 이래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혹은 백제와 가야가 진출해 오면서는 자치적인 세력으로서, 여수지역을 대표하던 토착 유력자들의 전통적인 세력기반은 차츰 약화 축소되어 갔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귀족 출신의 수령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말단의 행정실무나 담당하는 데 만족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자연히 토착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혹은 비교적 자율적으로 행해지던 해상교류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지방세력 나름의 발랄한 해상활동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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