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를 여행하고 있다 했더니 “어디가 제일 좋아?” 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감하다, 이런 질문. 난 말이지, 달걀프라이는 반숙이 딱 좋더라. 바닥은 기분 좋을 정도로 익었지만 윗면은 완벽한 원형의 노란 알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그 상태.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살며시 눌렀을 때 주르르 노란 즙이 흘러내리는 그 순간 나는 미칠 듯이 행복해. 달걀노른자를 각종 성인병의 주범으로 여기는 당신이라면 내 이런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내가 좋은 곳이라고 꼽는 곳이 당신에게는 전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시시한 곳일 지도 모른다. 백에 아흔 여덟 명쯤은 A형일 것이라고 추측당하는 소심한 나는 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곳을 당신도 좋아해줄까?
생각해 보면 여행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의 압도적인 비율의 지역은 강원도인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설악산, 대학교 때 과 친구들과 왁자하게 떠났던 춘천, 마감을 끝낸 밤에 선배와 함께 막차를 타고 닿았던 동해, 실연당한 친구가 눈물 흘리던 경포 바닷가……. 문득 그곳을 떠올리면 풍광보다는 함께 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생각난다. 그리고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즐거웠으며, 혹은 고단했던, 쓰윽 내 인생을 관통했던 생각과 감정들의 단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행은 어떤 기억이든 일상보다는 좀 더 강렬한 기억을 남기게 마련인 것 같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씁쓸한 것이든. 추억을 만들러 가기도 하지만, 때로 그 추억 때문에 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강원도는 생각보다 먼 곳이 아니다. 서울?강원 간 고속도로가 속속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강릉은 두 시간 반, 춘천은 4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그야말로 ‘만만한 곳’이 되었다. 강원도 매니아로 자처하는 지인 중 하나는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마음이 동하면 휭하니 강원도로 떠나곤 했다.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시침 딱 떼고 출근하기를 밥 먹듯 했다하니, 그야 말로 끌리면 끌리는 대로 염통에 벌렁벌렁 바람 들면 떠났던 것이다. 콧바람 쐬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도 때로는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강원도에서 아침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햇살이 스펙트럼처럼 비쳐드는 야생화 벌판을 걷거나 감자 꽃이 흐드러진 산비탈을 발등이 이슬로 가득 젖는 것도 모르고 황홀하게 걷곤 했다. 아아, 강원도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행은 설레게도 하지만 한편, 이런저런 걱정거리를 안고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휙하고 떠나는 여행이란 허울 좋은 말뿐, 사실 여행을 떠나기 앞서 혹은 여행지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소소한 방해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지도 보는 데도 서투르고, 내비게이션 언니와의 의사소통은 전혀라고 할 정도로 되지 않으며, 깐깐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서나 잘 먹고 잘 자요, 할 정도의 내공은 없는 것이다. 여행의 달인도 아닌 내가 이런 여행서를 내는 것은 -도대체 여행의 달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나와 같은 여행치들이 겪을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이 책이 덜어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한 몫 한다. 여행을 떠날 때 조금은 의지할 만한 구석이 되어 주고, 여행지의 낯선 숙소에서 한두 장 펼쳐보며 다음 여행을 그리며 안도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비로소 ‘아, 참 좋았구나’하는 여행의 기억은 일상에 스며드는 것이다. 무.사.히.
나는 여행을 떠날 때면 책을 몇 권 챙기곤 한다. 낯선 곳에서의 긴 여행이라면 지침이 될만한 여행서 한 권과 너무 두껍지 않은 소설이나 에세이집 한 권. 여행지에서 읽는 여행에세이는 독특한 맛이 있다. 크레타 섬이나 아일랜드,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한 작가의 에세이는 전혀 다른 장소지만 어쩐지 함께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여행하는 사람끼리 느끼는 동질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떠난다는 마음일 지도 모른다. 소설책보다는 말랑하게, 여행에세이보다는 가벼웁게, 내 책은 여행지에서간혹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는, 잠들기 전 마지막 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장 여행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으면 좋겠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야말로 실은 여행의 가장 중요한 덕목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이라면 일상마저 신선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여행이든 그것은 행복으로 향한 것이고, 떠난 순간 혹은 떠나려고 마음먹은 순간 이미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지떵는 어디로 갈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하는 좌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다. 혹, 이 책을 읽고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떠나려는 마음이야 말로 여행의 가장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만을 다룬 책은 아니다. 제목을 보고 그런 장소만을 기대했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 어디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가 남아 있겠는가. 그보다는 그저 스쳐 지나가던 유명 장소의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이 굳이 이 책을 ‘비밀 코스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것이다. 많이 보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보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그것이 내 사소한 여행 이야기를 풀어낸 까닭이다. 일 년여 동안 부지런히 강원도를 여행했고, 그때 느꼈던 강원도의 아름다움을 순전히 100% 주관적인 시점에서 썼다. 참 뻔뻔스러운 작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들고 여행을 하겠다면 뭐, 할 수 없다. 여행은 그렇게. 어쨌든 떠나는 거다. 그리고 ‘이 여행서 반댈세’라고 외친다면, 적극 환영이다. 여행서가 우스울 만큼 훌륭한 여행을 했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여행 아닌가. 여행서는 어디까지나 참고할 여러 지침 중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여행은 당신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자, 이제 강원도로 떠나 보자.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