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암흑의 밤보다 동트는 새벽을 기도한다
철들고 나서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온 의문이 있다. 역사의 향방과 역사의 주체에 대한 회의가 그것이다.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해방이 되고 근대 헌정이 시작된 지 60년을 넘어서까지 때로는 역류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여울처럼 급류를 이루기도 했던, 저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면서 그 의문은 깊어져 갔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라든가 ‘역사는 어차피 힘 가진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이다’ 라는 가설이 정설인 양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역사에 대한 나의 의문은 더해 간다.
그 의문은 아득히 먼 기원전 사마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천은 역사를 위하여 거세된 선비이다. 흉노 정벌에 실패한 한(漢)나라의 명장 이릉(李陵)을 변호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고, 무제(武帝)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마천은 역사를 저술하기 위하여 죽어서는 안 되는 몸임을 자각한다. 끝내 그는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하고, 거세된 몸으로 만고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남긴다. 그리고 그는 역사에 대한 뼈아픈 회의를 던진다. ‘천도(天道)’ 그것은 과연 옳으냐 그르냐? 라고.
고등학교 시절 나는 『사기』를 비봉산 기슭에서 처음 읽었다. 보병 소대장 시절, 휴전선을 지키는 철책에서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인물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하늘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부초처럼 흔적 없이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이 별과 같이 명멸하고 있었다.
겨울밤 휴전선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도 역사의 숨결은 담겨져 있었다. 지난 우리의 근현대사가 말해주듯,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이었기에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마음 더욱 간절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역사인식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정치에서 사십 년의 세월을 지나온 지금 내게는 많은 아픔이 있다.
한때 번뜩이는 시대정신, 기자정신에 나는 얼마나 충실하였던가. 나는 그 정신을 구현하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삼십여 년 전 현역 언론인 시절의 일이다. 로마에서 취재를 마치고 파리로 가는 도중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심한 악천후를 만나 비행기가 곤두박질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어떤 백인 여자 승객은 주기도문을 소리치며 외웠고, 한 동양인 승객은 새파랗게 질려 울부짖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내 옆자리에 있던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일본인 남자는 당시의 상황을 가족들에게 남기는 듯 차분하게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일본인 탑승객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내가 지나온 길에는 심한 악천후가 많았고, 파도가 높았다. 그만큼 그 길에 대한 기록은 더욱 소중할 것이다. 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쓰는 것은 특별히 글재주가 있어서도 아니고, 더구나 잘났다고 유별나게 뽐내고 싶어서도 아니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그 일본인 탑승객과 같은 마음이다.
나는 언론인으로, 또한 정치인으로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꿈을 전하며 살아왔다. 책 제목을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로 한 것은 나는 아직도 희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내가 지나온 길을 객관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담겨 있다. 내가 기술한 정치적인 사건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고희의 나이를 먹으면서, 그동안 내가 겪었던 주변의 상황들을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되뇌었을 뿐이다. 어쩌면 회한과 반성하는 마음이 더 깊게 깔렸을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희미하거나 분명치 않은 부분은 후기한 문헌들을 참고하거나, 나의 견해와 일치한 경우에는 원문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글을 쓴 분들에게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또 가능한 한 표현을 객관화하려다 보니, 관계된 분들의 직함이나 존칭을 생략하는 수가 많았다. 죄송스럽다. 불쾌해하거나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 나라 근대 헌정 육십 년, 적지 않게 정권이 들어서고 물러나는 과정에서 그때마다 주역들은 자신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동트는 새벽’을 열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또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주는 ‘암흑의 밤’을 몰고 왔다. 동트는 새벽은 암흑의 밤을 헤치고 나온다. 암흑의 밤 없이는 동트는 새벽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동트는 새벽에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도 암흑의 밤보다 동트는 새벽을 기도한다.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서 희망을 보고 있다. 굴곡 진 역사 속에서 40여 년 동안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온 나의 회고를 책으로 엮으며, 여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만큼 내 인생이 쓸쓸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일일히 밝히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을 발행한 도서출판 연장통 최훈 대표, 항상 가까운 곳에서 원고를 정리하는 데 손발이 되어준 일자리 방송 김종필 부사장, 기획자를 자처하며 이 책의 출판 전반에 걸쳐 큰 도움을 준 나의 오랜 벗, 열화당 이기웅 대표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천십년 시월, 목림서실에서
하순봉
---머리말 중에서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다
나는 1976년 편집부 차장과 사회부 차장을 거쳐 1978년 정치부 차장으로 청와대를 출입하게 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저격으로 서거한 지 얼마 되질 않아 청와대 보안은 철저했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는 것도 엄격한 신원조사를 통과해야만 하였고, 특히 여권 언론사인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일부 신문과 KBS, MBC 등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MBC에서는 3명의 기자가 추천되었는데,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유신을 반대했다는 나의 신원기록을 보고 “MBC 기자가 유신을 반대해?” 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를 낙점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왜 그런 판단을 하였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국가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면모를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일보 안병훈, 이현구, 한국일보 송효빈, 윤국병, 중앙일보 성병욱, 동아일보 강성재(15대 국회의원 역임), 서울신문 이재근, 신아일보 김길홍(13, 14대 국회의원 역임), 부산일보 송정재, 국제신문 최귀영, KBS 박성범(15, 17대의원 국회의원 역임), CBS 김진기, 코리아타임스 조병필 씨 등 당대의 쟁쟁한 언론인들이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나는 얼마 후 기자단을 대변하는 출입기자단 간사가 되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