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체성이 아주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거대한 내러티브 통일체라기보다 기껏해야 깜박이는 단편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데이비드 흄이 오래전에 규명한 바와 같이, 우리 내면의 삶은, 기억의 방들에 엄청나게 더러운 빨랫감들처럼 흩어진, 단절된 지각의 더미들로 이루어져 있다. 텍스트를 임의로 잘라서 붙인 듯한 ? 또한 보위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에게서 빌려 온 것으로 유명한 ? 브라이언 가이신(Brian Gyson)의 컷업 테크닉(cut-up technique)이 온갖 자연주의보다 현실에 훨씬 가까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 pp.17-18
앤디 워홀은 1968년 발레리 솔라나스의 총에 맞은 뒤 말했다. “총을 맞기 전,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총에 맞은 후,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1971년 앨범 헝키 도리(Hunky Dory) 수록곡 ‘앤디 워홀’에서 보위가 워홀의 진술에 짧고 예리하게 내놓은 해설은 무척 날카롭다. ‘앤디 워홀과 은막 / 두 가지는 절대 구별할 수 없어.’ 예술가와 그 관객의 자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더 의식적인 수준으로 반복되며, ‘가짜(inauthenticity)’라는 자의식이 될 수밖에 없다. 보위는 이 워홀주의 미학을 반복해서 동원한다.
? p.25
나는 오래 전에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의 인터뷰를 읽은 적 있다. 거기서 프립은 1970년대 말에 보위의 스튜디오 녹음 과정을 지켜본 일을 이야기했다. 보위는 한 곡이나 곡의 일부를 들으며, 아주 세심하게, 반복적으로, 무척 신중하게, 아주 오래, 자신의 목소리에 적확한 감정을 만들어 내려 애썼다. 그보다 더 인위적이고 가짜인 것이 과연 있을까? 진짜 음악은 마음에서 곧장 나와서 성대를 거쳐, 우리의 기대에 찬 조개껍데기 같은 귀로 들어와야 하지 않나? 그러나 사람들이 말해 왔듯, 보위의 천재성은 목소리라는 매체를 통해 분위기와 음악을 세심하게 맞추는 데에 있다.
? p.39
나의 졸견으로는, 우리가 치유를 구할 음악에서 진정성(authenticity)은 저주다. 보위가 줄곧 힘을 보태 왔다. 보위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획책되고 반사적으로 인식된 정교한 환상이며, 그 환상에서 가짜는 거짓된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고 형체가 있는 진실에 복무한다. ‘퀵샌드(Quicksand)’에서 보위는 노래한다.
자신을 믿지 마
믿음으로 속이지 마
이를 조금 더 밀어붙이면, 더없이 연극적이고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음악이 가장 진실한 음악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따분한 사실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런 음악, 보위의 음악은 우리가 자신의 현재 모습이라는 사실에 고정되는 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우리 자신이라는 현 존재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잠시 동안 우리는 고양되고 고상해지고 변화될 수 있다. 노래는 아주 높은 수준에서, 가사와 리듬과 함께, 그리고 종종 구전 동요 같은 단순한 멜로디와 함께,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점을 연결하기 시작할 수 있다. 깜박이는 단편적 사실들. 노래는 우리가 다른 삶을 생각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
? pp.57-58
요점은, 1970년대 동안, 특히 1974년 이후로, 보위는 강렬함과 대담성과 위험이 무시무시한 예술적 ‘수련’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록 스타의 현상 안주와 아주 상반된다. 마치 보위가 무(無)로, 새 얼굴들을 취하고 새 환영들을 만들고 새 형식들을 창조할 수 있는, 엄청나게 창의적이며 움직이는 무로 변하기 위해 거의 고행으로 거의 은자처럼 스스로를 단련했던 것 같다. 기이하고 드문 일이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유일할 것이다.
? pp.117-118
보위는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거기에 종종 의문의 낙인이 찍히거나, 의심의 구멍이 뚫리거나, 후회의 기운이 감돈다.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의 타이틀 곡이 시작한 지 5분쯤 뒤 박자가 완전히 바뀔 때, 알레이스터 크롤리(Aleister Crowley) 의 마법과 카발라 비전에 극단적으로 빠진 보위는 즉각 질문을 던진다. ‘누가 나를 사랑에 연결시킬까?’ 그리고 이는 단지 코카인의 부작용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틀림없는 것 같아.’
‘히어로스’는 사랑의 무상을 다룬, 단 하루만 시간을 훔치는 것을 다룬 발라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통증과 중독이 있다 (‘그리고 나, 나는 항상 술을 마시겠지’). 즐거움은 덧없고 우리는 무이며 우리를 도울 것은 무임을 더없이 잘 알고 있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갈망하는 노래다. ‘렛츠 댄스(Let’s Dance)’는 단순히 간헐적인 시크(Chic) 풍의 베이스와 드럼 패턴이 중독성 있는 댄스플로어 펑크 곡에 그치지 않는다. 보위가 ‘히어로스’에서 묘사한 바로 그 연인에 대한 완곡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필사적인 노래다. 보위는 노래한다. ‘오늘이 전부라는 두려움을 위해 춤추자.’
? pp.134-135
보위에게서는 교권 반대 주의와 확립된 기존 종교 모두를, 특히 맹렬하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 이것은 보위의 가장 끔찍한, 그리고 끔찍하게 과장해서 공연되는 노래 ‘모던 러브(Modern Love)’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노래에서 교회는 자기 이익을 위해 인간을 겁주며 신과 인간 사이에 싸움을 붙인다. 그러나 사실 이 신과 인간 관계에는 ‘고해’도 ‘종교’도 필요없다.
이 사고방식이 우상 파괴의 절정이라 할 만한 것을 이루는 곡은 1984년작 ‘러빙 디 에일리언(Loving the Alien)’이다. 이 노래는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는 데에 내포된 정치적 흉포성을 비판하기 위해 십자군 모티프를 사용한다. 이방인을 사랑한다는 망상에 굴복하는 것은 그저 전쟁과 침략과 고문을 더 입맛 당기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사람은 그런 이방인 사랑을 위해 살인할 수 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살인을 즐기기까지 할 수 있다.
? pp.163-164
보위는 무와 전부 사이의 명백한 모순을 화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바뀐 것은 무인 동시에 전부다. 그러나 이 곡은 전부가 무며 무가 전부라는 뉴에이지 자족감 같은 아둔한 표현이 아니다. 음악판 재낵스가 아니다. ‘선데이’를 100분의 1초마다 뒷받침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떨림, 역겨움의 분위기다. 이것은, 노래의 중심에서, 한 목소리가 두 목소리가 되고, 토니 비스콘티의 불교 독경 같은 특이한 두 음계 노래가 보위의 목소리와 함께할 때, 드러난다. 비스콘티의 목소리가 읊조린다.
두려움에서, 평화를 찾으라,
두려움에서, 사랑을 찾으라,
두려움에서, 두려움에서
그 위로 보위가 노래한다.
우리의 지금 모습에 대한
두려움에서,
불 앞으로 가
이제 태워야 해,
우리 모습 모두
이 구름을 뚫고
함께 떠올라
시간의 넝마와 누더기를 몸에 걸친 우리의 지금 모습에 대한 두려움에, 우리는 지금의 모습을 모두 태워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없애고 전멸시킨 뒤에야 우리는 떠올라 구름을 뚫고 올라갈 수 있다. 저 높이. 이 시점에서 곡은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두 목소리는 하나가 되어 계속 노래한다.
날개를 단 듯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