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름답게 피어난 노랑 수선화가 먼저 보였다. 별처럼 활짝 벌려진 여섯 개의 노란 꽃잎 안으로 주홍빛 속잎이 있었다. 갓 따 왔는지 투명한 이슬방울이 마르지 않고 맺혀 있었다. 꽃잎과 그 속에 숨겨진 수술과 촘촘한 주름까지 바라보다가 멍하니 정신을 차렸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내 아파트는 아니었다, 물론. 내 방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넓은 방이었다. 그 침대에 나는 누워 있었다. 침대는 검은 결이 도드라지는 아름다운 목재로 짜였다. 나뭇잎으로 수놓인 푸른색 캐노피가 침대 지붕에서 흘러내렸다. 창문은 내 키보다 커 보였고 여덟 개나 있었다. 모두 하얀색 실크 커튼이 달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초조한 기분도 들어 버릇처럼 목깃을 매만졌다. 셔츠블라우스의 칼라 대신 밋밋한 천이 만져졌다. 두 손으로 마구 더듬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아이보리색 비단 가운이었다. 이 섬세한 천이 내 살결을 덮고 있는 감촉마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뭐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데 초콜릿 빛깔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가 누가 등장할지 조심스럽게 살폈다.
“늦잠꾸러기 같으니라고. 이제야 일어났군요. 기분은 어때요?”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청아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내 나이쯤 되었을 법한 금발 머리 아가씨가 스텝을 밟듯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지나치게 깡마른 몸매에 통짜 드레스를 입었다. 새끼손톱 같은 산호를 꿰서 만든 세 줄 목걸이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저 아가씨에게 설명을 부탁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었는데, 아가씨가 선수를 가로챘다. 봇물 터지듯 엄청난 말이 줄줄 나왔다.
“곤히 자기에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입덧 때문에 고생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한동안 잠을 설쳤잖아요? 창문을 확인하려고 잠깐 들어왔어요. 날씨가 따스하다고 해도 바깥바람을 너무 많이 쐬는 것은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해서요. 괜한 걱정이라고 또 타박할 거죠? 어쩔 수가 없어요. 이게 제 성격인가 봐요, 부인. 좋아요. 그럼 여덟 개 중에 두 개를 제외한 여섯 개만 닫을게요. 다 닫으면 그야말로 숨통을 죄는 것이니까요. 어머, 또 이불을 찬 거예요? 애도 아니고. 무조건 따뜻하게 있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은 귓등으로 들은 거죠? 그럴 거면 좀 더 두꺼운 가운으로 갈아입으라고 말했는데도 무시하고. 덕분에 제 걱정만 늘잖아요.”
아가씨는 나를 억지로 눕히며 차렵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는 창문을 닫으러 갔다. 워낙 말이 빨라서 나는 그녀의 말을 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죠? 저기, 아가씨. 부인이라고요?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한 것 같은데요.”
“어머나, 갑자기 웬 아가씨? 예의 차리니까 이상하네. 평소에는 로즈라고 잘도 부르면서. 오스트란드 아가씨, 아가씨 하는 건 해롤드나 아랫사람으로도 괜찮아요. 새삼 낯간지럽잖아요. 부인.”
정말 이질적인 호칭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부인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아니 그것보다, 여기가 어디죠?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생뚱맞은 소리를 하네요. 부인을 부인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겠어요. 임페라토르의 안주인이 당신 말고 또 있어요?”
“네?”
임페라토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뜻하는 것은 딱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다. 아주 부유한 집안의 성이었고, 그곳에서 창설한 보석상 체인의 이름도 동일했다.
신문은 부자들의 가십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을 좋아했다. 상류층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사치품을 사들이는지는 쉽게 기삿거리가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는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 사이 거리만큼 무척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 아가씨가 장난하는 걸까? 빤히 보니 화장기로 앳된 모습을 감춘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설마요.”
나는 뺨을 후려 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으로 내뱉었다.
꽃병이 있는 탁자에 뉴욕 타임스가 있었다. 부랴부랴 앞면에 있는 발행일을 살폈다. 1930년 4월 30일. 눈을 씻고 봐도 그 날짜였다. 침대 위에 신문을 던지며 냅다 소리쳤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죠?”
밖으로 열린 창문을 닫으려고 허리를 반쯤 빼던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횡설수설했다.
“임신이며, 마님이며, 하다못해 임페라토르며 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장난이지만 여기서 그만둔다면 용서해 주겠어요.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여기로 나가면 되나요?”
나는 아가씨가 들어왔던 문으로 가려고 일어났다가 눈앞이 핑 도는 빈혈기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랫배를 만졌다. 미세하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다. 둔한 여자라도 눈치챌 만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달거리 외에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내 몸 속의 장기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고, 내 몸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저 아가씨의 말에서도 산모, 태아라는 단어가 나왔지.
“넘어질 뻔했잖아요…… 부인.”
아가씨가 나를 부축하려 들었다. 머리가 복잡하게 핑핑 도는 와중에 그 손길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 손을 쳐 버리며 균형을 잡고 일어났다.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다가 이내 눈물이 고였다.
“왜 그래요. 정말 무섭게…… 이상한 말만 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은 아가씨예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기어코 일어나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환한 복도가 나왔다. 급한 마음에 나오느라 맨발이었다. 보드라운 카펫 위를 걸으며 계단을 찾았다. 입구가 어디야. 이 정신병원 같은 소굴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런데 아가씨가 따라 나오며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힘은 꽤 억셌다.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이곳이 마님의 집이라고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여기가 내 집일 리가 없어요. 내 이름은 글로리아 민튼이고 난 결혼 같은 건 한 적도 없어요. 아기는-”
숨 가쁘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말을 멈췄다. 복도에 비치된 키 높이 거울에 비친 상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의 여자는 나였다. 그런데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처음에는 내가 아닌 줄 알았지만 분명 나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자기 얼굴도 못 알아보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럴 뻔했다. 너무나도 달라져서 날 몰라볼 뻔했다.
아버지 쪽에서 물려받은 진한 붉은 머리카락은 늘 덥수룩하게 등을 덮었을 뿐인데, 지금은 굽슬굽슬한 굴곡이 난 올림머리로 바뀌었다. 영양부족에, 피로에 거칠었던 피부는 반질반질했다. 가슴이 깊게 파이고 발목까지 떨어지는 실크 가운을 입고 있는 여인은 야릇한 분위기를 흘렸다.
열여덟 살 풋내기 소녀가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성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산모이기도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