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뜻밖에도 목장갑 낀 손을 뻗어 개의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마치 방금 전 끔찍했던 폭행을 끝으로 전생의 지독한 악연이 풀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길은 자못 정성스럽기까지 했다. 불현듯 공격이 멈추고 주인의 손길이 다감해지자 축 늘어졌던 개의 꼬리가 시계추처럼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핏물 섞인 분홍빛 침을 질질 흘리며 혀를 길게 뽑아 장갑 아저씨의 팔뚝을 살금살금 핥았다. ---「개들이 식사할 시간」중에서
아버지의 폭로 이후, 장갑 아저씨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벼를 베고, 사과를 따고, 비닐하우스를 치던 장갑 아저씨의 두툼한 손은 매일 아버지의 잔을 채우는 일에만 사용됐다. (……) 벌이가 시원치 않자 아저씨는 품팔이를 그만두고 뒤꼍에 천막을 지어 개를 잡아 팔기 시작했다. 노상 피비린내와 노린내를 풍기는 아저씨는 마을의 불가촉천민이었고, 언제 칼과 토치램프를 들고 사람들을 덮칠지 알 수 없는 잠든 살인마였다. ---「개들이 식사할 시간」중에서
독배가 제 처를 본 척 않고 아기의 어깻죽지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핏기 없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기가 넘게 울던 아기의 눈가에서 영롱한 눈물 몇 방울이 독배의 발치에 때깍때깍 떨어졌다. 젖은 눈에서 눈곱이 떨어졌을 리는 만무하여, 독배가 허리를 굽혀 방바닥을 구르는 작은 알갱이를 내려다보았다. 연한 황금빛이 도는 유백색의 알갱이는 마치 덜 자란 진주 같기도 했고, 뭉쳐놓은 사금처럼도 보였다. ---「눈물」중에서
눈 주변의 피부를 동그랗게 도려내자 두개골에 단단히 틀어박힌 크고 동그란 안구만이 남았다. 소녀는 핏물로 침침해진 두 개의 눈을 손등으로 훔치며 기자의 낡은 칫솔을 세면대 모서리에 꺾어 뾰족한 쪽을 포크처럼 안구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 뿌리 깊은 당산나무가 뽑혀 나듯, 덜 자란 어금니가 펜치에 뽑혀 나듯, 소녀의 이마에서 칫솔대를 매단 달걀만 한 안구가 세면대로 떨어졌다. 소녀가 수증기로 부예진 세면대 거울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거울 속엔 이마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소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물」중에서
생전 처음 살인을 저지른 날, 나는 살해되었다. 남자는 내가 너무 쉽게 죽어버린 걸 아쉬워한다. 그는 내게서 몸을 떼고 바지를 입는다. 질식사한 내 얼굴은 어떨지 궁금하다. 시퍼럴까? 아니면 시뻘걸까? 어느 쪽이더라도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는 잠시 곁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살아 있었을 때 그렇게 다정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라면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거짓말」중에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을 누른다. 환한 불빛 속에서 정교하게 도려낸 당신의 손가락을 본다. 피가 묻어나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돌아와 나는 당신을 바닥에 눕히고 나도 그 옆에 눕는다. 당신이 석 달 만에 돌아온 집에는 당신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손가락뼈가 허옇게 드러난 당신의 어여쁜 손가락을 애처롭게 만지고 또 만진다. 당신의 얼굴은 죽은 사람 같지 않게 희다. 죽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죽지 않은 것이다. ---「거짓말」중에서
“어떤 해파리는 영원히 살 수 있대. 살다 싫증이 나면 우산처럼 몸을 접고 바위에 딱 달라붙어버린다지. 거기서 잠깐만 웅크리고 있으면 다시 젊어지는 기적을 일어난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나도 몰라.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따라붙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걔들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생체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는 거야. 영원히 죽지 않는 해파리한테 가장 소중한 건 뭐라고 생각해? 먹이나 애인? 동료나 가족? 어쩌면 필요할 때 달라붙을 수 있는 바위가 아닐까.” ---「스틸레토」중에서
“남자는 죽은 사향나무를 톱으로 켜 그 안에 웅크린 아이를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누가 볼세라 집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영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다시 정원의 다른 사향나무와 사랑에 빠지고 그 결실로 아이가 태어나길 반복해왔습니다. 기묘한 건 태어나는 아이마다 모두 사내아이라는 거였지요. (……) 하지만 내 아버지 대에서 대가 끊기고 말았죠. 놀랍게도 딸이 태어난 거예요. 바로 저 말이죠.” ---「사향나무 로맨스」중에서
나는 슬펐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것이, 다섯 토막의 짧은 그래프로라도 남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신선은 대답 없이 내가 준 손목시계를 어루만졌다. (……) 세이코, 당시 꽤 고가였던 이 시계는 몇 번이나 전당포와 술집에 맡겨졌지만 부메랑처럼 언제나 내 손목에 되돌아오던 소중한 재산 목록 1호였다. 나는 신선에게서 그것을 다시 빼앗고 싶었지만 이제 시계를 찰 손목이 없었다. 조약돌을 쳐낼 손가락도 없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중에서
다만 안타까운 게 있다면 혜주에게 나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쁜 어른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 사랑받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짓고, 또 사랑을 거절하기 위해 거짓 울음을 흘릴 나이가 되면 혜주도 나와 봉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애 역시 언젠가는 제 부모를 닮아 나쁜 어른이 되고 또 제 아이를 착한 아이로 기르려 애쓰다 늙어 죽을 게 뻔하다. (……) 그걸 깨닫고 나면 제 아비처럼 세상살이가 한결 쉬워질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