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한국의 불평등에 나타난 불평등의 구조변화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소득, 자산, 교육, 주거, 문화, 건강 등 불평등의 여러 차원이 서로서로 엉겨 붙어 체계적으로 중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의 소득과 자산 → (사)교육 → 상급학교 진학 → 취업 → 소득과 자산’이라는 순환구조가 마치 변신로봇처럼 하나의 완성체를 이룬다. 특정 영역의 불평등에만 눈길이 꽂히면 불평등의 온전한 형태는 파악되지 않는다. 지니계수라는 가면 뒤에는 어마어마한 불평등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이것이 불평등이라는 낡아빠진 사회과학적 연구주제를 새 공책에 다시 쓰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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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격차란 다양한 불평등 영역이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개별 불평등의 작동방식과는 독립적인 내적 작동방식을 갖춘 불평등의 특수한 형태다. 이런 개념규정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갖는다. 첫째, 다중격차는 다양한 불평등의 범주들로 이루어진다. 소득·자산·주거·교육·문화·건강 등과 같이 불평등의 여러 영역들이 다중격차를 구성하는 부분요소들이다. 둘째, 다중격차는 다양한 불평등 범주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다중격차는 단일 범주에서의 불평등이나 이 범주들이 단지 병렬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을 넘어 범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성립한다. 불평등 범주들 사이의 만남이 일회성 조우에 그친다면 다중격차가 아니다. 셋째, 범주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중격차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독자적인 형태를 갖춘다. 따라서 다중격차는 각 범주들을 모태로 삼지만 각 범주들과는 독립적인 자체 구조를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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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체계적 중첩은 객관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주관적 인식의 차원으로 파급되고 있다. 우리는 다음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늘어가고 있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 1순위로 꼽는 공무원은 안정성에 대한 희구를, 2순위인 건물주는 노력 없이 취득한 자산을 통한 임대소득을 삶의 방편으로 여긴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 희망은 재벌 자식인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하네!”라는 우스갯소리는 씁쓸함마저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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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잠식시킨다는 것은 곧 공동체로서의 국가와 사회의 축소 내지는 해체를 의미한다. 촘촘한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구축과 자산의 세습을 막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분배 이전의 분배(predistribution)’를 경제와 사회정책의 결합으로 삼는 정책이념 혹은 정책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과 이의 최종설계자와 집행자로서 충분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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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중격차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불평등을 바라보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어느 하나의 불평등이 아니라 소득, 자산, 교육 불평등이 결합하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조형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물론, 개별 불평등 범주의 독립변수들이 완전히 배타적인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다중격차가 출현하기 전에도 소득이 높으면 자산도 많을 확률이 높고, 있는 집 자식이 성적이 좋을 확률도 높았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결합의 정도와 추이, 그리고 국민의 삶에 미치는 효과다.
--- p.96~97
이러한 한국 사회의 다중격차 구조는 많은 정책적 함의와 과제를 던져준다. 노동배제적인 기술변화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자동화의 상한선을 둘 수 있는 것인가, 경제적 개방은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 제고와 배제된 노동의 조직화는 가능한 것인가, 조세와 재정을 통한 재배분 정책과 보편적 사회권에 기초한 복지정책의 방향은 무엇인가, 독점 규제와 정격유착 차단, 불로소득 환수, 그리고 지대 공유와 플랫폼의 공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수많은 경제사회적 의제들이 한국의 다중격차 불평등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 p.139~140
결국 경제자본, 인적자본, 사회자본의 동조성은 자본의 소유 여부에 따른 계급 구분이 중층적 성격을 띠어 일종의 다중격차를 발생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어느 한 가지 유형의 자본이라도 남들 못지않게 갖고 있다면 그를 기반으로 일어서거나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지만, 세 가지 유형의 자본 결핍이 중층적으로 존재한다면 현재 삶에 대한 애착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자본, 사회이동성, 사회적 포용을 삼각축으로 하는 사회통합은 더욱 지난한 과제가 될 것이다.
--- p.174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영세 자영업자와 비공식 노동자들 이외에 새롭게 노동계급으로부터 분해되어 등장한 프레카리아트의 확산은 금융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기인한 바 크다. 주주가치의 실현과 투자자 보호가 핵심적인 가치가 되고, 이익 실현의 사이클 은 점점 더 단기화된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성 향상을 위하여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주변적 업무는 외부화하게 되는데, 이때 디지털 기술이 허락한 네트워크의 발달은 외부화로 노동자를 “털어내고도” 표준화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만들었다(와일 2016). 과거에는 사업을 관할하는 ‘지배권’이 고용을 통해 직접적인 지배권의 행사로 이행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디지털 경제 시대의 네트워크 기술은 지배를 유보적으로 행사하거나(특고, 독립계약자, 프랜차이즈), 간접적으로 행사하더라도(하청, 용역) 원하는 만큼 사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박제성 2016).
--- p.196
비정규직, 청년실업, 노인빈곤, 저출산 문제가 10여년 만에 한국사회의 최대 이슈들로 부각되었지만, 주류 노동-시민운동이 이 문제들에 기울인 노력은 제한적이다. 새로이 출현하는 ‘배태성의 정치’는 급증하는 불평등과 격차의 희생자들을 방어하고 그들이 ‘시민의 사회 권리’를 회복하는 길을 터주는 정치, 그 정치가 소외된 외부자에 대한 ‘자선’이 아니라, 다수 시민의 미래를 위한 ‘보험’임을 집단적으로 깨닫는 정치일 것이다.
--- p.221~222
한국 역시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민주정부’의 고백과 민주정부와 보수정부 간 복지에 대한 합의점이었던 “생산적 복지”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복지와 노동체제는 시장체제의 하위체제로 기능한 지 오래다. 한국은 케인스 복지국가의 기본틀을 갖춘 서구 복지국가가 축소와 재편의 갈등에 처한 상황과 달리, 복지체제 형성과정에서 시장체제를 교정하거나 방어하기보다는 이에 순응하거나 최소한의 기능적 체제가 만들어지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은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다양한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구현되고 구축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국가화가 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의 사회정책과 복지제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어 수용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