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사회는 모든 구조가 패놉티콘(panopticon)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인을 사회화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권력은 학교, 군대, 병원, 감옥에서 그 효과를 입증했던 규율로 일반 시민들까지 감시 범위에 넣었다. 권력이 만든 규율은 반성할 일도 없는 시민들에게 반성할 것을 강요했으며, 급기야 우리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마저 공격하고 있다. 패놉티콘이란 ‘모두’라는 의미의 pan과 ‘보다’라는 opticon이 합쳐져 생겨난 말로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다. 죄수의 방은 권력자들이 감시할 수 있게 밝게 유지된다. 반면 감시탑은 권력자들이 원형으로 만들어진 죄수들의 방을 지켜볼 수 있게 가운데에 자리 잡은 채 어둡게 유지된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죄수들은 늘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결국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1부_리더답게] 중에서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는 《황금가지》에서 아프리카 에이에오Eyeo 왕국의 오래된 관습 하나를 들려준다. 그 왕국에서는 국왕의 통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신하들이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앵무새 알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통치하는 부담을 지느라 수고했으니 이제는 걱정에서 물러나 잠시 잠을 잘 때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면 왕은 신하들이 자신의 안녕을 배려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마치 잠을 자려는 듯이 거처로 물러나 그곳에서 부인들에게 자기를 목 졸라 죽여달라고 지시한다. 이 지시는 즉각 집행되며, 그의 아들이 조용히 왕위에 올라 백성이 지지를 보내는 동안에만 지속되는 통상적인 임기 동안 통치권을보유하게 된다. 물론 가끔씩 앵무새 알을 거절함으로써 반란과 대학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관습은 19세기 말까지 존속되었다.
민주정치의 핵심이 이 오래된 관습에 다 들어 있다. 지도자와 국민이 주종의 관계가 아닌 상호 협력 내지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룰 때 왕국이든 국가든 존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부_리더답게] 중에서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법정스님의 말이다. 나는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인생의 봄은 끝난다고 믿는다. 생활 속의 발견(serendipity)을 왜곡하지 않고, 탱탱한 마음을 유지하며 조용히 늙어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다.
젊을 때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놓은 노년이야말로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카토는 말한다. 결국 노년을 위해, 무언가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보다는 현재를 충실히 살면서 노년의 어귀로 자연스레 들어가라는 말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미래의 내 모습이다. 노년에는 노년에 맞는 관심사가 있을 뿐, 지금 하고 싶은 걸 미룬다고 그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다. 다만 현재의 관심사를 따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당기다 보면 노년의 선택이 다양한 색깔로 풍성해질 것이다.
[2부_시민답게] 중에서
솔론, 그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초석을 세우고 체제를 정비한 입법자다. 시민 전체가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또한 남의 불행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양심의 연대’를 목표로 하는 사회에 어울리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솔론이 활동하던 기원전 600년 무렵 아테네는 농민계급의 몰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빚을 진 농민들은 채권자에게 토지를 저당잡히고 연간 20%에 가까운 이자를 물어야 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귀속되었다. 아테네는 대다수의 자유농민이 사라지자 빈부격차가 심해져 위기를 맞았다. 솔론은 먼저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인신 저당으로 노예가 된 시민에게 자유를 선언했고 빚 때문에 토지를 빼앗긴 경우 빚을 탕감하고 이전 상태로 환원시켰다.
그는 “재물을 갖고 싶다. 그러나 부당하게 얻는 것은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시대는 솔론에게 절대권력을 주었고, 시민들도 그에게 재물을 가져도 좋다고 동의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거절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신을 흔들림 없이 믿었다. 그것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2부_시민답게] 중에서
2016년 90세의 나이로 숨진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을 숭배하는 어떤 표현도 거부했다. 그는 생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를 기관이나 광장, 공원, 거리 등 공공시설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의 뜻에 따라 어떤 기념물이나 흉상, 동상을 세우지 않을 거라고 밝힌 (심지어 그의 동생이 이끄는) 쿠바 정부 또한 얼마나 멋진가. 나는 이것이야말로 리더의 지혜이고 시민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동상 문제와 관련해 가장 적절한 고대 시민은 마르쿠스 카토(BC 234~149)인 듯하다. 로마 민중은 감찰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한 마르쿠스 카토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신전에 카토의 동상을 세운 뒤 그를 기리는 기념 문구에 카토의 군사 지도력이나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해 적는 대신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로마가 휘청거릴 때 감찰관으로 선출되었고, 유익한 지도력을 보이며 지혜로운 방법으로 규제하고 건전하게 타일러 로마를 바로 세웠다.”
그러나 이 일은 카토가 원했던 것도 아니거니와,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카토는 줄곧 자신의 모습이 동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동상의 명예는 단지 조각가와 화가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고,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은 동료 시민들의 가슴속에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명성이 없는 자들의 동상이 널려 있는 반면 카토의 것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의 동상이 없는 이유를 묻는 것이, 나의 동상이 있는 이유를 묻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것이 카토의 진면목이었다.
[3부_나라답게] 중에서
13세기 양쯔 강의 북쪽에는 몽골제국이, 남쪽에는 남송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잇는 남송 정복의 대업이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에게 주어졌다. 쿠빌라이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남송의 관문인 상양과 번성을 포위하고는 100km가 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시작하면서 어떤 공격도 하지 않는 전략을 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자 10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전쟁터를 중심으로 시장이 생겨났다. 7년여의 대치가 계속되자 남송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몽골군은, 투항해 오는 남송의 병사들을 잘 대우해 돌려보내고, 성안에 기근이 들면 군량미를 보내주기도 했다. 이를 보면서 남송 군사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오히려 적국을 흠모하게 되었다.
전쟁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는 걸 보면서 남송의 장수 여문환과 그의 병사들은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놓고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여문환과 그의 군사들은 ‘위대한’ 지도자 쿠빌라이 칸에게 투항했다. 자발적 복종을 택한 여문환은 몽골군의 사령관이 되어 남송과 마주했고, 결국 1275년 남송의 13만 병사는 몽골군에 투항하면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남송은 몽골에 통합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원나라의 태조 황제가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제국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중국 문화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통찰력을 바탕으로 쿠빌라이 칸이 ‘마음’의 전략을 취한 결과였다.
[3부_나라답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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