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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뿔 황비님

사슴뿔 황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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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94쪽 | 614g | 148*200*30mm
ISBN13 9791130020778
ISBN10 113002077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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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당기고 숨을 죽인다.
모든 신경이 하나로 쏠린다. 세계가 급격히 좁아진다.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긴장으로 몸이 터져 나가기 직전까지 버틴다. 진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속으로 셋을 센다.

셋, 둘, 하나.

그녀는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토끼의 몸을 똑바로 관통했다. 토끼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축 늘어졌다. 흰 털에 피가 번진다. 그녀는 목걸이를 꺼내 입을 맞췄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문밖 갈고리에 토끼를 걸어두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오늘은 토끼를 잡았으니 운이 좋은 날이었다. 한 번도 자기가 나쁜 사냥꾼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좋은 사냥꾼이라도 매일 사냥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겨울이 오면서 산에 짐승이 줄고 있었다. 혼자서 버티는 겨울은 처음이니 잘 대비해야 했다.

‘혼자서 버티는 겨울.’

그녀 스스로 떠올린 생각이 묘하게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방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침대 옆엔 곰팡이가 슨 목조 욕조가 보인다. 사실상 동물 피를 뺄 때나 쓰는 것이다. 그 옆으로 조리대가 있고 거울 달린 옷장이 있다. 그게 여기 있는 전부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들릴 리 없는 목소리다.
진은 목걸이를 풀어 침대 옆 선반에 내려놓았다. 목걸이에 달린 붉은 보석이 햇빛에 반짝 빛을 발한다. 할머니가 진에게 물려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할머니. 할머니는 오로지 그 목걸이 하나만 남기고 몇 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도 그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는 인생 단 하나의 친구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혼자다.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떨치고 바깥에 걸어둔 토끼를 가져왔다. 토끼는 하도 많이 잡아서 손질이 손에 익었다. 피를 뽑고 털을 제거하고 가죽을 보존액에 담가뒀다. 무두질이 쉽도록 해두면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남은 고기는 감자와 당근과 우유를 넣어 수프를 끓였다.

고기가 익는 냄새가 좁은 오두막에 가득 찬다. 수프를 그릇에 담을 때에야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이란 걸 알았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루카스가 사라진 지 벌써 반년, 수프 냄새에 그녀는 습관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다음 날 진은 토끼 가죽을 팔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녀가 터를 둔 이 마을은 산동네 중에서도 산동네, 한 달이 지난 소식이 이제야 발 빠른 이의 귀에 들어오는 변두리 마을이다.

오는 길에 그녀는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대는 마을 여자들을 보았다. 근래 마을은 황위 시험 때문에 떠들썩했다. 반년 전, 늙고 병든 황제가 드디어 황위를 물려주기로 선포한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실종되었던 5황자가 시험 직전 나타난 기적적인 이야기는 벌써 유명했다. 여자들은 누가 황제가 될 것인지 내기를 하는 듯 동화를 짤랑이면서 자기들끼리 깔깔 웃었다.
진이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자 여자들이 대놓고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녀가 몰래 끼어들어 엿듣기라도 한 양.

물론 그녀는 그런 이야기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저런 한심한 이야기나 하느니 차라리 벙어리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황자와 마법, 용이 나오는 세계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와 루카스가 살았다 떠난 그 작은 오두막이 그녀 세계의 전부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빨리해 가죽가게로 들어섰다. 가죽가게 엠마 아주머니는 그녀가 내놓은 가죽을 들어 흠잡을 곳을 꼼꼼히 찾아내고는 엄숙히 선언했다.

“5딜런. 그 이상은 안 돼.”

루카스와 같이 왔을 땐 늘 7딜런이었다. 그녀는 답답해서 고개를 돌렸다.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그냥 5딜런을 받고 돌아섰다. 화를 내봤자 뻔하다. 애들만 남은 거 불쌍해서 잘 챙겨줬더니 어디서 적반하장이냐고 눈을 뒤집을 것이다. 엠마의 레퍼토리는 너무 진부해서 오히려 말하는 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딱히 돈이 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루카스가 남기고 간 돈은 아직 좀 남아 있었다. 어디서 그만한 돈을 구했는지, 왜 진작 안 주고 떠날 때에야 놔두고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세상 유일한 소꿉친구.

아니, 진은 루카스 생각을 그만두었다.
루카스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떠난 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아무 날도 아닌 날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떠났다. 그녀는 막연히 그가 떠난다면 왔을 때처럼 첫눈 오는 날에 떠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리는 눈 속에서 홀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

할머니는 그녀와 루카스가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글쎄, 그녀가 보기에 그는 절대로 여기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빵과 먹을거리, 화살을 사들고 어둑해진 산길로 들어섰다. 바람소리가 불길했다. 요 근래 마을은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겨울이 오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이 굶주리는. 그제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원래 이맘때쯤 그녀는 항상 활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오늘은 없다. 까맣게 잊은 것이다. 이런 적이 없었다. 루카스가 사라진 것이 모르는 새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던가. 그녀는 걸음을 빨리했다. 집까지는 삼십 분. 왠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냥꾼의 감이라는 것이 있다. 쫓아본 자는 쫓는 자의 기척을 안다. 굳이 이런 격언을 떠올리는 이유야 뻔하다. 그녀는 노려지고 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무리에게.

쫓는 양상을 보니 굶주린 늑대 무리가 틀림없다. 수는 서넛. 가끔 성질 급한 그르렁 소리가 희미하게 잡히는 걸 보니 제법 가까이 있다. 보통은 이쯤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중하게 굴었다. 오랜 굶주림 탓에 기력이 많이 쇠한 탓이다.

그녀는 냉정하게 살아날 확률을 점쳐보았다. 집까지는 십 분. 달리는 순간 일 분 내로 따라잡힌다. 그렇다고 계속 걷는다면? 그들의 신중함은 오 분 이상 지속될 성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느닷없이 몸을 모로 돌려 풀숲으로 들어갔다. 늑대 무리의 당황이 느껴졌다. 좋다. 그녀에게 의외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들이 더 신중해지도록. 그녀는 속도를 빨리해 성큼성큼 걸었다. 한편으로 허벅지 뒤쪽에 찬 벨트에서 단검을 꺼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대로 스무 걸음. 그녀는 속으로 일부터 수를 세기 시작했다. 까마득히 멀리서 들리던 풀이 짓밟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스물.’

그녀는 걸음을 뚝 멈췄다.
모든 소리가 그쳤다.
춥다. 이렇게 추운데도 관자놀이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그녀는 단검을 꽉 쥐었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빼곡히 선 나무들이 그녀 뒤로 빠르게 스쳐간다. 늑대 떼들 사이에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곧 그들은 컹컹 짖으며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는다. 이제 십 초도 못 버틸 것이다.
등에 끈적한 숨결이 달라붙는 것 같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녀는 속으로 할머니를 부르짖었다.

‘할머니……, 제발 나 좀 살려줘요.’

갑자기 머릿속에 루카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겐 이제 누구도 없다.

그 순간 진의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숲이 끝나고 별이 뜬 하늘과 저 멀리 까마득히 먼 마을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열 발자국도 안 되게 가까이 땅이 끝나고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진은 달리면서 단검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절벽과의 여유를 두고 발을 박찼다. 상체가 바닥으로 향하도록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녀가 방금 지나온 모든 것들이 뒤집혀 보인다. 침을 흘리며 달려오는 늑대 떼들이 앞다투어 이빨을 들이민다.

바로 그녀 눈앞으로 늑대의 벌어진 아가리가 확 다가왔다. 숨결에서 공복의 썩은 냄새가 났다.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도 소름끼쳤다. 콧등에 시린 감각이 스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 거대한 이는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시야 위쪽이 암석으로 뒤덮이고 있다.

그녀는 손에 쥔 단검을 뒤로 힘껏 젖혔다가 온 힘을 다해 절벽에 꽂았다. 반동으로 팔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단검은 드드득 소리를 내고 절벽 틈으로 파고들어 갔다. 몸이 휘청 돌면서 세상이 다시 뒤집힌다. 그녀의 등 뒤로 묵중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늑대 하나가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한참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절벽 위는 아무 기척이 없다. 절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그녀를 찾는 기척도,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기척도. 어쩌면 그녀를 유인하려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늑대는 지능이 높은 동물이니까. 하지만 더 이상 매달려 있다간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이럴 때 루카스는 늘 마지막에 등장해서 떨어지려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곤 했다. 늦게 와서 생색은 다 낸다고 짜증내도 빙글빙글 웃기나 하곤.

가끔 그녀는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음껏 자도 깨우는 사람이 없는 날, 이대로 영원히 자더라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 때. 무덤과 사체 말고는 말 걸 데 없을 때.

그럴 때는 괜히 원망할 대상과 기억을 찾게 된다. 떠날 거였으면 그렇게 다정하게 굴지 말지. 그런 말 같은 거 하지 말지…….

할머니가 죽은 날이었다. 할머니는 그녀가 아는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었지만 막대한 치료비를 대기는 무리였다. 그녀가 벽에 기대어 눈물이 신발코에 떨어지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 루카스가 다가왔다.

「진.」
「응.」
「절대로 이런 일 다시 겪게 하지 않을게.」
「……응.」
「내가 널 황비로 만들어줄게. 평생을 행복하게 살게 해줄게.」

그때 그가 어떤 목소리로 그런 말을 했었던가. 그녀를 안아줬던가. 그러나 그런 말을 담기에 그는 너무 미숙하고 어린 소년이었다. 대충 잘라 덥수룩한 머리와 긴 소매를 늘어뜨린 모양은 영락없는 시골 아이였다. 가끔씩 그 눈동자에 뜻 모를 음울함이 감돌 때조차 단순히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일 따름이었다.

아니,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는 떠났다. 더 이상 팔의 통증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체념했다.

그녀는 힘겹게 절벽 위로 팔을 걸쳤다. 온몸의 뼈가 다시 맞추어지는 듯한 격통이 몸을 감쌌다. 그래도 그녀는 꾸역꾸역 올라갔다. 간신히 상체를 완전히 절벽 위로 걸친 뒤에는 바닥을 기어서 발끝까지 끌어올렸다. 그제야 진정하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
여섯 개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인가의 불빛을 등지고 선 그녀에게 보이는 빛은 오로지 그 형형한 안광뿐이었다. 그녀를 속이는 데 성공한 그들은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맥이 탁 풀렸다. 모든 게 끝났다. 가장 몸집이 큰 늑대가 이를 드러내고 침을 흘렸다. 입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한 발자국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반대쪽 손으로 떨리는 손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아주 긴 숨을 쉬었다. 마지막 숨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리운 사람을 불렀다.

‘할머니.’

무덤에 가려고 했었는데.

“찾았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진이 살면서 들었던 것 중 가장 끔찍한 소음이 그녀를 덮쳤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이 눈을 찌른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흙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한참 뒤에야 소리가 멎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도로 태연해졌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늑대들은 모두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꺼멓게 탔다. 그 뒤로 수십 명의 제복을 입은 군사들이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안도감 이전에 상황 파악부터가 안 됐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5황자께서 들어오십니다!”

몇십 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는 당황해서 물러나려다 도로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다.
군사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양옆으로 갈라서서 한쪽 팔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정렬했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루카스였다.
그녀의 7년째 소꿉친구.

‘루카스가 5황자라고?’

루카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 진.”

그의 파랗던 눈동자는 이제 선명한 붉은색이다. 가장 고귀한 혈통, 용족의 피를 이어받은 로열 블러드만 취할 수 있는 색. 반년 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러나 그녀가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분명 나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선이 얇은 턱과 하얀 피부 등 외모만 봤을 때는 누가 봐도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소년이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거의 두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절대 작지 않은 키인데도 그녀는 그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는 와이셔츠 단추 한두 개를 풀어헤치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황실의 문양이 금자수로 박힌 벨벳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잔 근육 있는 팔뚝 위로 긴 힘줄이 사선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허리에는 긴 장검이 검집 째 달려 있었다.

그는 안 본 사이 어깨도 넓어진 것 같았다. 원래도 오랜 노동으로 단련되었던 몸이지만 지금은 왠지, 크고 굵어졌다고 해야 할까. 누구라도 한 손에 쥐어 잡을 법한 강인한 분위기가 온몸에 감돌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눈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동자 색뿐만이 아니라 눈빛까지 변했다.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듯 오만하고 날카로운 시선.

그녀는 5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동네 여자들이 낄낄거리며 했던 말들. 실종된 줄 알았다 반년 전 혜성처럼 황궁에 입성한 황자. 사람들은 모두 대체 그가 어디 있다 나타났는지 궁금해 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산골 동네는 아주 외곽 변두리 동네다. 제국병들이 찾아내기엔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예 다른 문제다. 실종된 5황자가 어느 작은 변두리 동네에서 몰래 살아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루카스라고? 그녀와 7년을 함께 살았던?

그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풀렸다. 그녀는 그의 품 안으로 넘어졌다. 그가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그는 열다섯 살부터 진의 키를 넘어서 열일곱 살에는 그녀의 머리가 그의 코끝에 겨우 닿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안겨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었다.

“오랜만이니까 다시 소개부터 할게.”
“…….”
“마가리타 제국의 5황자, 루카릭스 드 마가리타야.”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바람에 날렸다. 웃는 얼굴만큼은 아직 소년처럼 싱그러웠지만, 단지 친구로 여기기에 그는 이미 완연한 한 명의 남자였다.
루카스가 품속의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다시 웃었다. 그녀는 낯설어진 품에 위화감을 느꼈다.

“널 황비로 만들어주겠다고 했었지. 그래서 데리러 왔어.”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그러나 그건 다 해묵은 위로일 뿐이다. 그때 그가 어떤 식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에 없다. 하물며 진심으로 바랄 리가…….

갑자기 콧등이 아려왔다. 그녀는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말라붙은 피 사이로 푹 팬 홈이 느껴졌다. 늑대가 할퀴고 간 흉이다. 몇 년째 입는 허름한 가죽 셔츠, 다 떨어진 신발, 피투성이 얼굴. 그녀에게 황비라는 단어는 북쪽 나라에서만 핀다는 눈꽃, 혹은 비겁한 농담 같았다.

“진.”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그녀는 백치마냥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등 뒤에 검은 나무들이 솟아 있고 그 위로 달이 떠 있다.
뻔하고 신성한 장면이다. 어느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아름다웠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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