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사진계에서 발생한 두 번째 변화는, 사진을 예술 형식의 하나로 탐구하기 시작한 미국에서 일어났다. 진지한 학술적 접근은 더 많은 관객을 사진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계기로 사진가들이 상업성과 거리를 두고 생계를 꾸릴 가능성이 나타났다. 세 번째 변화의 진원은 1962년 모마 사진부의 수석 큐레이터로 자르코프스키가 부임하며 시작된다. 이 변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많은 전시와 (중요성이 덜하지만 여전히 영향력 있는) 출판물들로 유통되는 사진 매체에 대한 자르코프스키의 접근은 과거의 중요한 사진은 물론 동시대의 사진을 이해하는 방식을 전혀 다르게 변화시켰다. 1967년 자르코프스키가 “새로운 도큐먼트 전”에서 다이앤 아버스, 리 프리들랜더, 개리 위노그랜드를 소개한 글을 보자._ p. 20
1970년대 초반 개념미술가들은 베트남 전쟁과 그에 따르는 세계적인 사회 불안으로 관심을 전환하면서, 이미지와 권력의 관계를 탐구하고 입증하기 위해 사진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동유럽의 대학에서 학생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시기에, 토미슬라브 고토바츠(도판 82), 브라코 디미트리예비치(도판 80)는 제도화된 주류 미술에서 벗어남으로써 예술을 공적 공간 및 실제 정치 현실로 확장해나갔다. 또 이들 세대의 선두에 있던 산야 이베코비치의 개념미술은 유고슬라비아의 여성 재현에 비판적인 시선을 겨누어 당시의 순응적인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1979년 5월 10일 산야 이베코비치는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삼각형(도판 88)이라는 정치적 반항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날은 바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자그레브를 공식 방문한 날이었다. 대통령의 자동차 퍼레이드가 전진하자, 작가는 자위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1964년 출판된 현대 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연구서인 톰 보터모어의 《엘리트와 사회》를 읽고 있었다._ pp. 66~67
“내러티브”라는 용어는 형용사로 사용하기도 하고 명사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진을 촬영하고 또 사진을 사고하는 이들에게 이는 무척 행복한 일로, 이를 통해 사진 매체를 대단히 심도 있게 또 폭넓게 활용할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만약 한 장의 사진이 그 프레임 속의 시공간을 넘어서 확장될 수 있는 장면 혹은 상황을 담고 있다면 그 사진을 “내러티브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 여러 장으로 구성된 사진 시리즈에서 연관성이나 관계성이 감지된다면 그 사진 시리즈를 “하나의 내러티브”라고 부를 수 있다. 조화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여러 사진이 오케스트라와 같은 조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용법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_ p. 110
퍼포먼스 확산에 적합한 매체로 사진을 꼽는 이유는 복제 가능성 때문이다. 1969년 발리 엑스포트는 밑이 뚫린 가죽 바지를 입고 뮌헨의 한 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관객들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노출하는 순간 그녀의 몸은 즉각 여성 권능화를 체현했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첫째, 빈 행동주의 작가들이 수행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격렬하고 공격적인 표현 방식에 대한 응답이자, 둘째, 기존 영화의 관습적 공간과 구조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확장된 영화라는 자신의 관념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페터 하스만이 나중에 찍은 사진은 작가가 동일한 의상을 입고 다리를 벌린 채,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커다란 포스터로 인쇄되어 빈 전역에 부착되었다.(도판 142) 이 이미지는 원래의 퍼포먼스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지만, 시각적 선전을 통해 이 작품을 지속시킨다. 퍼포먼스와 사진이라는 두 형식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아멜리아 존스는 이렇게 썼다. “신체 예술은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을 확증하기 위해 사진이 필요하고, 사진은 지표성의 존재론적 ‘닻’으로서 신체 예술 사건이 필요하다.”_ p. 153
사진가들이 기다려온 결정적인 순간의 의미가 이전과 달라졌다. 외부 현실의 생생한 흐름보다는 대중문화가 보여주는 동시대의 균질성 혹은 역사의 다양성이 결정적인 순간의 또 다른 원천이 되었다. 뷰파인더의 시야 제한이나 암실의 크로핑 작업처럼 특정한 장면을 선별하는 과정은 사진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지만, 1970년 대 작가들은 이 선별 과정에 점점 더 적극성을 띠었다. 그리고 이 선별은 뷰파인더가 아니라 세계 자체에서 작품의 중심 주제를 잡아내는 쪽으로 심화되었다. 작가가 대량 생산된 이미지를 소재나 주제로 표현하기 위해 매체에서 장면을 선별하는 일은 거리에서 포착한 한 순간만큼이나 사진의 결정적 순간으로 부상했다._ p. 193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부활은 유럽,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활발했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영국 수상으로 선출되면서 커다란 사회, 경제적 변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크리스 킬립, 그레이엄 스미스, 존 데이비스, 마틴 파, 폴 그레이엄 등이 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들 다섯 명은 이후 1991년에 모마의 전시 “대처 시기의 영국 사진”에 초대되었다. 이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또한 19세기 폴 마틴에 이어 빌 브란트, 토니 레이 존스(도판 40) 등의 영국 사회 사진 전통의 후대이기도 했다. 이들은 중형 카메라를 선호했는데, 이동식 카메라의 장점과 이미지의 선명도를 모두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레이엄은 이러한 장비 선택을 미국식 미학에 대한 유럽식 응답으로 파악했다. “컬러 필름을 장착한 대형 카메라는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하지만 플라우벨 사의 카메라는 유럽산이 확실하고, 바로 지금 영국에서 새로운 컬러 다큐멘터리 사진의 토대이다. 이동이 좀 더 자유로우며 좀 더 유려한 카메라, 질적으로 우수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어디든지 들고 뛸 수 있게 해주는 카메라이다.”_p. 239
사진과 세계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포토그램과 전용 사이의 경계가 붕괴하는 일이 실험 사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20세기 내내 카메라 없는 사진은 암실 기법과 우주의 영혼 사이를 맴돌았고 사진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 사이를 서성였다.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체코 프라하에서 활동한 작가 벨라 콜라로바는 양차 대전 사이에 시작된 “절대” 사진 혹은 추상 사진에 대한 실험을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1961년부터 그녀는 “라디오그램”이라 이름 지은 연작을 만들었다. 라디오그램은 카메라 없는 사진의 가장 일반적 형태인 X-선 사진을 말하는 체코 용어이다. 콜라로바의 포토그램은 신비한 초자연 등 작품 너머의 세계와는 무관하다. 원형 라디오그램(1962~1963, 도판 295)에서 감상의 즐거움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동심원 형태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작업 과정이 알 듯 말 듯 결합되어 있는 데서 나온다. (이 동심원은 회전판 위에 감광지를 놓고 체 모양을 통과한 빛에 노출시켜 얻은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