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뭔지도 전혀 모르겠고,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이는 꽤 성가신 일이다. 머릿속으로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목욕 가운 차림으로 거실을 활보하고 돌아다니는 그를 볼 때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다. --- 「사랑은 끝났다」 중에서
하루, 또 하루가 지나가고, 밤은 조용히 흘러간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마리 트랭티냥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기다렸다. 매 순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마다 베르트랑 캉타가 되어 있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잠에서 깨어나 결국 눈을 뜨게 되어버린 베르트랑 캉타,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짓을 저지르고 그 미친 짓이 꿈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베르트랑 캉타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베르트랑 캉타가 되어 꿈에서 깨어났고,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내가 속한 현실이 아니라고,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사람들은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었다. 베르트랑 캉타가 기도할 때, 사람들도 동시에 같이 기도했다.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에게 간청을 하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마리 트랭티냥이 죽지 않게 해주소서. 이 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해주소서. 단 몇 시간만이라도 뒤로 되돌릴 수 있게 해주소서. --- 「기다림의 여름」 중에서
당신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매번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당신은 갑자기 입을 닫아버리고, 내가 말을 할수록 당신은 잠이 드는 거다. 내가 하는 말은 순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수면제가 돼버린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떠날 거라고 얘기하고, 당신은 눈을 감아버린다.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지만, 당신은 말 그대로 잠에 푹 빠져든 상태다. 마치 무슨 기계 전원이라도 나간 듯 단숨에 잠이 들어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잠을 잔다. 곧이어 쌕쌕거리며 신나게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내게 묻는다.
“황토색이 좋아, 환한 베이지 색이 좋아?” --- 「낮과 밤」 중에서
너희들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같은 존재가 되어 늘 기다림과 갈구의 대상이 될 것이고, 너희들이 오는 날은 잔치 분위기가 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권태감으로 무기력해진 부모의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고,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으며, 잠자라고 악을 쓰는 일도 없을 것이다. 홀어머니 혹은 홀아버지의 외동딸, 외동아들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에게는 거의 모든 게 다 허용된다. 장차 너희들이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혼란스럽지는 않느냐는 질문도 들을 테고, 성적이 떨어진다면 그건 예삿일, 성적이 오른다면 그건 예상 밖의 일이 될 것이다. 머리가 아플 때도 있고, 배가 아플 때도 있겠지만, 이제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모두 헤어진 부모 탓이 될 것이다. --- 「부모의 이별을 아이들에게 말하는 법」 중에서
우리는 일단 불이 꺼지면 저속하게 섹스를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랑을 나누지도 않는다. 얼마나 교양 없고 진부한가! 우리는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당신은 남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다. 안 그런가? 당신은 물이 새는 걸 수리하는 것 따위,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것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 「벌써부터 그리운 당신」 중에서
그렇게나 마음이 아픈 상태에서도 일이나 농담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으니까. 간 사람의 존재가 그 부재를 통해 산 사람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몰랐었어. 죽은 자에게 그 같은 관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너그러운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지. 죽은 자의 자리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사실, 그 자리가 늘 그대로인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렇게, 또 때로는 저렇게 바뀌기도 한다는 사실, 어떤 때는 사람 숨통을 조이다가도 또 어떤 때는 너무나 잠잠해서 걱정스러울 정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 --- 「그 사람의 자리」 중에서
내가 그를 위해 처음으로 식사를 차려준 일이 기억난다. 슬픔과 고독 속에서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났을 때, 집에 저녁을 먹으러 온 남자가 있었다. 그렇게 한 남자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그가 나를 집으로 바래다주던 길에 우리는 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건물 입구에 내려주었고, 나는 그에게 진도를 조금 더 나아가자는 제안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 입을 맞추려던 순간, 불편한 기색으캷 그는 이제 여자를 품에 안는 게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의 몸짓은 서툴렀고, 팔꿈치는 백미러에 부딪혔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맨 처음 연애가 시작될 때에는 그렇게 서툰 모습조차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다. --- 「익숙하지 못해서」 중에서
이제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없고, 침조차 삼키지 않는다. 나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본다. 탁구대로 달려갈 수는 있겠지만,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불편하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내게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지가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당신이 내 아버지고, 내가 당신 자식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신다. 모든 게 뒤바뀌고 뒤섞이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 와중에 엔진은 계속해서 돌아간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유년기가 끝났음을 직감한다. 프랑스 남부의 캠핑장에서, 내 어린 시절이 그렇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 「나의 열 살」 중에서
과부들은 남편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바보 같은 망상놀이에 빠져든다.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 자신을 예쁘게 꾸며보기도 하고, 미용실에도 가보며, 혼자 씽긋씽긋 웃어보기도 한다.
과부들은 위로라는 게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다른 데에 생각이 빠져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며, 결정적으로 넋이 나가 있다. 과부들은 옆으로 비껴 나가 있는 존재들이다. 삶으로부터, 즐거움으로부터,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 「과부들이란」 중에서
당신이 집어 든 그 물건들이 평화로운 나날을 망쳐놓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당신의 새로운 인생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를, 불행을 가져오는 부적이 되기를 기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당신이 대체 이 집구석에서 정말로 무엇을 찾으러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문득 당신의 잔혹함이 여과 없이 발휘되어, 순간 당신이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잡히진 않을까 두려웠다. --- 「남겨진 물건들」 중에서
당신과의 삶에 대한 결산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당신을 향한 애정을, 새삼 당신에 대해 느낀 애정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주위에서 좌초된 사랑의 아찔함을 보게 될 때,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환상과 흥분된 순간 및 무한한 기쁨의 허상을 보게 될 때, 사랑한다는 것, 혹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고통과 관련하여 줄기차게 이어지는 대화를 듣게 될 때, 실패의 흔적이 들어 있는 책, 상실의 미학이 펼쳐지고 있는 온갖 책을 읽을 때, 나는 감히 당신을 돌아보며 당신을 사랑한다고 누차 이야기하고,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거나 유행에 뒤처지는 것이라 해도 나는 이를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원칙적으로 따지고 들면 이게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그럴싸한 행동이 아니라도 말이다. 오늘 밤, 내가 다시 당신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내 인생 전체를 당신에게 내어주겠다는 뜻이다.
--- 「시간이 흐르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