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께서는 형태를 가진 물질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이야말로 그 크리스털 잔에 너무 집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건 모순 아닙니까?”
“이 잔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보아라. 이 잔에 아름답게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들도 보아라. 이 잔이 벽에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무지개는 또 어떻고. 이 잔을 통과한 햇빛이 방 전체에 부서져 아름답게 춤추는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 잔에 물을 받아 마시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고말고. 이 잔에 물을 마시면 물이 훨씬 깨끗하고 신선하단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게 있어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다. 난 이 잔을 보며 기뻐할 수도 있고,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도 있고, 잔에 물을 받아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이 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부주의하게 이 잔이 내 팔꿈치를 치고 테이블 위에 부딪치든, 아니면 잔에 물이 묻어서 내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백만 조각으로 산산조각 나든 이 잔이 이미 깨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라면 그때 내가 해야 할 말은 ‘아, 그럼 그렇지’ 이것뿐이다.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니 말이다. 알겠느냐? 놀라움과 분노 때문에 조바심치거나 호들갑 떨 필요가 없지. 그걸 받은 첫날부터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니까.”
----------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스물아홉 살의 레오나드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어린 딸도 있었다. 이미 그는 단기간에 젊은 개업 변호사로 촉망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에 널리 알려지고 사랑을 받았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병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있는 중이었다. 수많은 명성과 수많은 가능성, 아내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수많은 시간들까지도.
나는 아름답고 청량한 겨울날 레오나드의 우아한 집 정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상당히 마르고 창백해 보였다. 극적인 체중감소로 인해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그에게 몇 치수는 더 커보였다.
“이제껏 할 수 없었던 얘기 중에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요?”
“음……” 그가 대답했다. 그는 마치 내 질문을 정말로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았다.
“바로 지금처럼 살아있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전부 너무나 무서워하고, 너무나 슬퍼하죠. 제 몸이 병에 걸려 불편한데도 전 이제야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저 혼란스러워 보이기만 해요. 아니면 엉엉 울기도 하죠.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말해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들으면 제가 완전히 정신 나간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게다가 가끔은 제가 완전히 미쳤다는 느낌도 들어요.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황홀함과 즐거움이 느껴지거든요. 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레오나드의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슬프고 두려운지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 곳에 갔었다. 그런데 레오나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이 끔찍한 병에 유린당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주 평화롭고 즐거워보였다.
나는 레오나드 쪽으로 몸을 돌려 물었다.
“왜 당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생각하죠?”
그는 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인생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거예요. 미래가 없다면 미래에 행복하기를 바랄 수 없죠. 매일 매일 행복을 찾아야 해요. 또 실제로 가능한 일이죠. 지구상에서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게 되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갑자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죠.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도 바뀌고요, 시각도 달라지죠. 인생에서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깨닫기 시작하는 거예요. 주위 사람과의 관계를 진짜로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거죠. 매일 매일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정말로 모든 것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매 순간순간, 햇빛 한 줄기 한 줄기, 매번 호흡하는 신선한 공기, 사람들과의 포옹, 입맞춤 하나하나 줄갰사하게 될 거예요.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보이죠. 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들리고요. 전에는 전혀 맡지 못했던 냄새들을 맡고,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맛을 느끼게 되죠. 모든 것들이 위대한 예술품처럼 보이고, 웅장한 교향곡처럼 들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게 이제껏 먹어봤던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요! 제 아내와 어린 딸의 얼굴은 신이 창조하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보이고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천사의 목소리 같죠.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는 너무나 달콤하고요. 어제 딸아이가 저를 위해 구워준 브라우니는 너무나 달콤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싶지 않을 거예요. 어디든 다 가보고 싶을 테고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죠.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레오나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웃고 있는 동시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띠며 날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는 낄낄거리며 내게 물었다.
“글쎄요, 레오나드.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어떤 기분이요?”
레오나드가 물었다.
“죽어가는 남자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