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sound is gone”
- 김윤기, road to honey
기능사회의 저편에서
김윤기의 작업을 둘러싼 몇 가지 논점들
성기완(시인, 뮤지션)
방황
이제 방황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낭만적인 시대는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한 때 방황은 적극 장려되었다. 가령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는 빌헬름 뮐러 Wilhelm Muller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처녀 Die Schone Mullerin의 두번째 곡 어디로 Wohin?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Let it sing, my friend, let it rush,
And wander joyously after!
친구야 시냇물이 노래하며 달려가게 놔두세
우리도 즐겁게 물길 따라 방랑하세!”
방황, 또는 방랑은 한 때 예술에 이르는 너무나 결정적인 방식이었다. 근대 사회는 예술가에게 ‘방황’이라는 중요한 일을 맡김으로써 방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술가는 즐겁고 고통스럽게 방황하다가 화려한 근대 도시의 그늘 속에서 죽어갔고 사회는 그 시체를 아주 맛나게 맛보아 왔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근대 예술의 시나리오였다. 방황과 고독과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이들만이 불멸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그 누가 방황할 겨를이 있을까. 방황이라는 말은 그저 기능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취준생’의 어정쩡한 상태나 과정을 지시할 뿐이다. 그 겸연쩍은 시간을 ‘방황’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호사를 사회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방황하는 예술가들도 병든 채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차라리 예술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방황하기 위해 후드를 뒤집어 썼다. 그들은 모여 있지도 않고 큰 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화려함을 흉내내지도 않는다.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잊혀져 갔고 그럴 수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방황은 시작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김윤기다.
2. 기능사회
우리는 기능사회에 살고 있다. 종교적 신념도 사라지고 이념도 사라진 세상에서 기능한다는 것은 이윤을 남긴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어떤 큰 이윤의 작은 동력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직업을 갖는다. 국가는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을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여긴다. 우리에게는 일자리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못 갖는 일은 서글픈 일이다. 일자리는 육각형의 작은 밀납 감옥과 같은 것이다. 거기서 붕붕거리며 꿀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 육각형의 우리에 갇혀 살아야 한다.
3. 혼자
기능사회에는 역설적으로 ‘혼자’의 개념이 없다. 기능사회의 사회적 성취는 철저한 팀작업으로 도달된다. 기능한다는 것은 팀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팀에 들어가 팀워크를 발휘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진다. 기능사회의 디자이너들은 팀으로 일한다. 팀원이 되기 위해 아이덴티티를 지운다. 개인성을 개인사물함에 넣어두고 클라이언트의 구미에 맞춰진 결과물을 떨어뜨리기 위해 팀장의 요구에 감각의 촛점을 맞춘다. 팀장은 팀원을 채찍질한다. 팀장의 팀원들에 대한 가학은 이윤중심의 기능사회를 추동하는 기본 원리다. 김윤기는 기능사회의 팀원이 되기 싫어 차라리 ‘혼자’를 택한다. 이 ‘혼자’는 외로움이이나 쓸쓸함과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을 연쇄작용으로 불러내지만 실은 그 반응은 선입관의 스파크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혼자’는 ‘드라이함’의 유지를 위해 선택된 작업방식에 가깝다. 작업방식으로서의 ‘혼자’는 김윤기의 중요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이 ‘혼자’는 혼자로서의 팀워크를 혼자서 발휘한다. ‘혼자의 복수성’, 다시 말해 ‘단일한 의식의 다중성’은 김윤기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모든 작업에 적용되는 일관된 작업방식이다. 김윤기는 그래서 혼자이며 혼자 작업하는 여럿이다. 음악도 만들고 드로잉도 하고 시도 쓰며 동영상도 찍는다. 그것은 김윤기라는 혼자의 여러 확장자다.
4. 혼자와 디지털 환경
혼자의 집에 열쇠를 열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기능하기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기능의 시간을 마치면 혼자의 집에 들어간다. 그 혼자의 집에 디지털 환경이 있다. 디지털 환경이 혼자를 담보해주는 물적 조건이다. 다들 혼자지만, 디지털 환경 덕에 대화의 화자가 존재하게 된다. 김윤기에게도 디지털 환경은 필수불가결하다. 김윤기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곤충스님윤키 시절의 앨범 “관광수월래”(2000년, 캬바레 레코드)에서부터, 혼자인 김윤기는 집에 있는 전자 악기, 컴퓨터, 시퀀싱 프로그램, 샘플링 데이터, 그런 것들을 가지고 논다. 가령 그 앨범 안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보면 녹음 장소가 ‘미성아파트 1동 1102호 곤충스님윤키의 방’이라 적혀 있다. 이 장소성은 매우 중요하다. 김윤기라는 ‘혼자’의 유일한 작업수단인 디지털 환경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쓰여진 것들’이라는 항목에는 ‘턴테이블들, 믹서, 8트랙 녹음기, 좌뇌, 약간의 우뇌, 생수통’ 등등이 적혀 있다. 이러한 일종의 ‘아카이빙’은 김윤기의 작업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어떤 도구들을 사용했는지를 적는 일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INSTRUMENTS: computer, Roland TR-707, Casio SA-47, left handed electric bass, left handed electric guitar, left handed acoustic guitar, Shure SM58S, Kazoos, Chinese whistler(…)
(…)
all instruments are played by Yoonkee Kim
singing: Yoonkee Kim
recorded on TASCAM Portastudio 488
Recording Date: 28 August 2016 - 1 November 2016
composed, written, recorded, mixed and mastered by Yoonkee Kim
그의 2017년의 음반 Lotion Plaza의 크레딧에 적힌 내용이다. 그는 여전히 전설적인 카세트 멀티트렉 레코더인 타스캄 포르타스튜디오를 쓴다! 김윤기는 그 작업 환경 자체를 흔적으로 남긴다. 그가 작업을 통해 남기고 있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혼자인 환경’ 자체다. 디지털 팔레트도 혼자인 그의 집에 있다. 김윤기는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리고 혼자인 그 상태로 백지, 아니 하얀 상태의 모니터를 마주한다. 그 대면에서 마우스는 흰 색에 균열을 가한다. 그 뿐이다. 그의 작업은 혼자의 집 안에 갖춰진 디지털 환경의 산물이자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그의 비주얼 작품은 흰 모니터에 가하는 모종의 균열이다. 그것이 이른바 ‘챔피온 사운드’를 상대하는 김윤기의 유일한 저항이다.
“champion sound is gone
climax to the shore
comedian's love story exists to drain”
astral finance
5. 열쇠 감추기 또는 감춰놓은 시
열쇠를 감춰두는 것은 불가피하다. 아무나 ‘혼자’인 나의 환경에 침입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때로 그 열쇠는 나도 어디있는지 모른다. 나는 요즘 자기가 숨겨둔 열쇠를 찾지 못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어떤 불가피성을 증언한다.
김윤기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작품 안에서도, 딱히 침으로 정곡을 찌르듯, 음식이 침샘을 자극할 때 턱 주변에 통증 섞인 쾌감이 일 듯, 수용자를 자극하는 포인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종의 ‘어늘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의 작품을 대하면 대할 수록, 어눌함의 저편에 숨겨진 열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의 영어가사를 보면 열쇠가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윤기는 한 때 주로 영어로 가사를 썼다. 김윤기의 영어구사는 흥미롭다. 잘 한다는 티를 내는 영어는 아니지만 잘한다. 그렇다면 왜 영어로 가사를 쓸까? 얼마동안 살았던 영국에서 이해받기 위해서? 그건 아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열쇠를 숨기는 장치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가사에 열쇠가 있다. 언어의 틈서리에 열쇠를 은밀하게 숨겨놓는 행위로 무엇이 태어나나. 바로 ‘시’가 태어난다. 시는 깊은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쉽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련한 언어의 비밀번호들이다. 김윤기의 가사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시들이다. 이 언어들 속에는 작은 위안들도 있다.
Scandinavian syrup was voted
major flavor was noted
Ice cream was bottled
cherry story adopted
정교하게 짜여진 각운 ‘ted’를 활용한 이 시는 최소한 나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귀여운 라임이 스칸디나비안 시럽이나 메이저 플레이버나 아이스 크림이나 체리 스토리를 어여쁘게 가둔다. 그 자체로 예쁜 병이다. 정작 이 노래는 예쁜 것들이 병에 담겨 숨을 쉬지 못하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기도 하다. 위안은 위안을 주거나 위안을 질식시킨다. 위안들 역시 금방 배반당한다. 이 배반당한 마음이 시를 감춰놓는다. 기능사회의 화려함에 시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시는 더욱 스스로를 감춘다. 그럴수록 김윤기 같은 예술가는 더욱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깊은 곳에서 샘솟는 시의 온기로 일상을 따뜻하게 매만지는 비밀스러운 사랑, 작은 위안들이 느껴진다.
6. 혼자만의 ‘하이’와 분노
작업하는 김윤기는 열쇠를 숨긴다. 김윤기가 숨기는 것들이 있다. 세상은 다 드러나길 원한다. 세상은 궁금해하고 예술가는 드러내는 척 하면서 숨긴다. 김윤기는 화가 나지 않은 척 한다. 세상이 오히려 김윤기에게 화가 난다.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윤기는 알고 있다. 어차피 세상은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뭔지 관심이 없다. 기능사회의 저편에 있는 그를 잘 발견해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김윤기가 숨기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어떤 작은 ‘위안’이다. 그것을 김윤기는 ‘하이’라고 표현한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며 순간적이라 남들에게 설명 불가능한 그 ‘위안’을 김윤기는 ‘하이’라고 부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령,
Higher I needed to get
combining songs as a set
swinging baseball bat
as I need to hit
각운이 잘 맞춰진 이 가사에서 그러한 점이 드러난다. 그는 히트를 치기 위해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노래를 버무려 한 ‘세트’를 만든다. 그리고 ‘하이’에 도달한다. 이 ‘하이’는 남들에게 잘 발견되지 않는다. 혼자인 디지털 환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 이 음악들은 그가 어려서 듣던 힙합과 관련이 있다. 힙합은 일종의 배트 휘두르기이기 때문이다. 힙합은 국외자들에게 마련된 유일한 ‘batter’s box’, 즉 타석이다.
또 하나,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 역시 잘 발견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김윤기가 좀처럼 차분함을 잃지 않는 톤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얼까. 역설적으로, 그것은 분노다. 김윤기는 마치 분노 따위는 다 졸업한 것처럼 무기력한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의 디지털 팔레트와 샘플러들이 숨기고 있는 것은 기능사회의 저편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명백한 분노다.
7. 기능하지 않기
김윤기는 기능하지 않기 위해 작업한다. 김윤기는 육각형의 우리 속에서 기능하는 사람들의 너절함과 막막함을 드러내기 위해 작업한다. 기능사회에서 기능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피스톤 운동을 하여 만들어지는 어떤 큰 이윤은 화려하다. 이윤만이 거대하고 화려하다. 이윤은 스스로 아름답고자 한다. 이윤만이 아름다움을 뽐낸다.
“WORKING IN A FACTORY PRODUCING BALLS
NICE ONE WAS MADE AND THE MAN GOES HAPPY
(Gentlemen)
공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해요
근사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그 분은 행복하죠”
김윤기의 ‘신사들’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기능사회의 생산방식과 산물들을 단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그 아름다움은 남루한 작은 동력들로 이루어진 노동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진실을 가리기 위해 화려함이 포장지로 요구된다. 화려함은 기능사회의 겉옷이다. 김윤기는 그 화려함을 거부한다. 기능사회의 저편에 있기 위해 화려함을 저버린다. 김윤기는 차라리 미완성을 택한다. 김윤기는 화려하지 않은 일상을 드러내기 위해, ’화려함’이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작업한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