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엔 영화의 엑스트라 같은 사람도 자기 인생에선 주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땐 자신을 사랑하기 어렵다. 거울 앞에 서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무능력하고 못난 사람이 보인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착각이다. 내가 참 괜찮은 인간일 거란 착각,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인간일 거란 착각 말이다.
내가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착각 때문이었다. 팔이 불편하면 다리로 할 수 있는 걸 하자, 달리기 하나는 정말 기똥차게 잘할 자신 있다, 하는 자신감 하나로 멋모르고 마라톤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운동역학을 공부하고 보니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착각이었다. 달리기는 결코 다리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며, 양팔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빨리 달리기 어렵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열여섯의 나는 튼튼한 다리 하나만 믿고 내가 그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그리고 그 착각이 오늘날의 마라토너 이홍열을 만들었다.
사실 타인의 평가는 늘 냉혹하기만 하다. 그 몸으로, 그 얼굴로, 그 머리로, 그 학력으로 뭘 하겠냐고 비웃는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자신에 대한 이런 냉정한 평가를 믿었다면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착각의 능력이 있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 착각 덕분에 우리는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다. 난 뜻대로 안 되는 세상쯤 가뿐히 이겨내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난 정말로 강하고 괜찮은 사람이니까……. 부디 당신도 이런 착각의 늪에 빠지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 착각이 언젠가는 반드시 현실이 될 날이 올 테니 말이다. --- pp.90-91
그날도 나는 여느 때처럼 관객과 아주 가까이 붙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앞쪽에서 웅성웅성 소란이 이는 것이 보였다. 한 아주머니가 “비켜, 비켜!” 하면서 사람들을 헤치며 마라톤 코스 가까이로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유심히 보면서 막 그 지점을 통과하려는 찰나,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이 내 온몸으로 쏟아졌다. 너무나 어이없고 황당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쉽게 파악이 되질 않았다.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아까 사람들을 헤치고 코스 쪽으로 나오던 아주머니가 빈 양동이를 들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게 차가운 물세례를 퍼부은 것이었다.
원래 마라톤 도중에는 물 한 컵도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떤 음료를 얼마만큼 마실지 철저하게 계산해서 섭취해야 장시간 달리는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달리는 도중에는 위장이나 신장 기능이 평상시보다 약간 떨어져 있는 상태라 특히 찬물 같은 것은 마시지 않는 게 좋다. 그런데 찬물 한 컵 정도가 아니라, 한 양동이를 전신에 맞았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상황은 마라토너에게 물벼락 정도가 아니라 날벼락이다. 몸에서 곧 이상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체온이 급격하게 하락하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근육이 무섭게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휘휘 가로저으며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결국 나는 물벼락을 맞은 후 200미터도 채 못 달리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 p.133
내가 마라톤 교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건 그 안에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100kg에 육박하던 몸무게를 달리면서 30kg나 감량해 새 인생을 찾은 사람도 있고, 위암이 자꾸 재발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한 사람도 있다. 함께 달리다 연인으로 발전하고 가족을 꾸리게 된 커플도 있고, 1km도 뛰지 못할 만한 약골이었다가 뉴욕마라톤 완주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달리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힘이 있기에 이런 기적과 희망이 생겨날 수 있는 걸까. 우리 몸이 달리면 마음에도 천천히 시동이 걸리고 더운 피가 돌고 열정이 피어나고, 그 힘으로 희망이라는 결실도 맺어지는 건가 보다.
조직폭력배 출신이었던 한 선생님도 그런 변화를 겪은 분 중 하나다. 한 선생님은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함께 달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한때 한 선생님은 치매에 걸리신 노모를 모시느라 운동을 아예 못했다. 노모의 증세가 심해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계는 제대한 아들이 책임지고, 한 선생님은 하루 종일 노모만 모시고 있는데, 그때 동호회 회장 사모님이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셔서 노모를 목욕시켜주고 밑반찬도 가져다주셨다. 원망과 미움만 받으며 살다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도움을 받으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에 한 선생님은 노모가 돌아가신 다음 자원봉사를 더욱 늘렸다. 고향인 속초의 불우이웃들을 돕는 데도 발 벗고 나섰다. 그러자 그 선행을 인정받아 속초시장상까지 받게 되었다. 고향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 다들 몹쓸 놈이라며 고개를 저었는데, 이제는 사람들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한 선생님의 꿈은 고향에서 마라톤대회를 여는 것이다. --- p.241
에밀 자토페크(Emil Z?topek)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전설적인 천재 육상선수다. ‘인간 기관차’, ‘달리는 기계’ 와 같은 무시무시한 별명의 소유자인 그는 194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올림픽에 출전해 각종 신기록을 세웠다. 특히 1952년 올림픽에서는 5,000m와 10,000m를 석권한 뒤 연습도 없이 난생 처음 풀코스마라톤에 도전해 우승을 거머쥐면서 육상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는 달리기 교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독특한 자세로 달리는 걸로도 유명했다. 정석에 의하면 달릴 때는 머리는 최대한 고정시키고 팔을 적절하게 움직여야 하체의 부담을 줄이고 빠른 속도를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심하게 흔들고 어깨는 덜덜 떨었으며 팔은 마치 무거운 보따리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위로 잔뜩 추켜올리고는 제멋대로 흔들어댔다.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뜨렸고 입으로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달리는 모습은 비효율적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정석대로 달리는 다른 선수들이 이루지 못한, 실로 괴물과 같은 기록을 세웠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자토페크가 달리는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에밀 자토페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 생뚱맞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인생은 자고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 수많은 가르침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걸까. 자토페크가 교본에도 없는 자신만의 기묘한 방법으로 전설이 되었듯이 우리네 인생도 때로는 정석이나 교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달릴 때 제대로 굴러가는 건 아닐까.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