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자기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는 역사 서술(historiographie)의 주장처럼 과거의 모든 것은 사라졌다고 노라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과거의 생생한 체험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릴 과거의 것들, 곧 과거의 기억들이 어떤 장소에 존재한다. 기억의 장소에 대한 연구는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노라는 표현한다. 현재의 프랑스 사회에서는 이 균형, 곧 과거와 현재의 균형이 상실되었으며, 과거의 모든 것을 사라지고 죽은 것으로 다루는 역사의 가속화가 지배적이다. 죽은 과거만을 인정하는 역사는 현재의 지반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를 기초로 해서 미래를 전망하는 현재에 생기 또는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지금 사회 공동체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 p.27
노라에게 장소는 생생한 체험이 불러일으키는 소속감을 보장하는 기억들이 남겨져 있는 곳,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사라진 것으로 파악하며 과거를 현재와 확정적으로 단절한 것으로 파악하는 역사학이 간과한 기억들을 간직한 곳이다. 이런 노라의 확신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마도 장소라는 표현이 환기시키는 감각적, 특히 시각적 존재 형식일 것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 즉 장소를 지금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학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만 이해되는 과거 사람들이 생생한 체험과 의지를 통해 그 장소들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 p.29
기존 구원론에서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 루터만의 경험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루터의 파격적 행보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주체는 다름 아닌 기존 교회의 작동 원리에 융화되지 못한 채 불안과 부담감에 시달린 자들이었다. 이들은 강압적 종교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치로 내건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영적 자유의 희망을 엿보았고 그래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1520년대 중후반 민중규율화 작업이 시작됨에 따라 이는 한낱 부질없는 희망이었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상당수 민중은 자신들의 꿈을 무산시키고 오히려 과거를 답습하는 양태로 치닫는 개혁에 더 이상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민중규율화 작업이 역경과 난항의 연속으로 이어진 근원적인 이유다. --- p.58
역사 교과서와 기념물, 그리고 영화에 관한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북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북부의 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적 역사, 즉 정의와 승리의 국가 서사는 자신을 지배적인 서사로서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남부의 ‘잃어버린 대의’ 역시 국민주의에 복무해야 하는 화해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었다. 화해의 서사에 따른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누그러뜨리고 상대의 대의를 존중하도록 만들며, 국가 분열과 전쟁을 불사했던 남부의 대의를 현재에 위협이 되지 않은 과거의 것으로 박제시켜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해의 서사를 받아들임으로써 패배한 남부의 대의는 절대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영속성을 얻었다. 도덕적 면죄부를 얻은 남부연합에 관한 기념물들은 당당히 공공장소에 자리해 ‘잃어버린 대의’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남부 대의가 복권되는 과정에서 인종주의 사회를 청산하는 문제는 중요성을 잃었다. --- p.77
수하르토 기념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어느 쪽도 기념관에 대해 논쟁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기념관이 수하르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며 “불신자를 전향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라는 지적도 사실이지만, ‘불신자들’ 측에서도 가족이 운영하는 민간 시설인 수하르토 기념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실정이다. 파푸아 독립운동 세력이나 1965년 피해자 그룹은 수하르토 기념관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으며, 수하르토 사건의 피해자들을 내세워 소송을 제기하는 등 수하르토에게 민족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데 격렬하게 반대해 결국 이를 좌절시킨 인권단체도 수하르토 기념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된다면 수하르토 기념관은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은 채 편향적인 역사관을 통해 수하르토의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기능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 p.107
20세기 현대사 관점에서 베를린은 ‘유령도시’, ‘악의 도시’, ‘분단도시’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소개된다. 앞의 두 별명이 히틀러가 총지휘했던 나치즘의 심장부로서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악몽에 사로잡힌 도시 이미지를 반영한다면, ‘분단도시’라는 닉네임은 냉전체제가 구축했던 베를린장벽을 연상시킨다. 1961년에 건설되어 1989년에 해체될 때까지 28년 동안 건재했던 장벽이야말로 베를린의 독특한 운명을 보여주는 명소 아닌 명소다. 21세기 베를린이 “창조적 파괴의 파우스트적 국면”을 통과하는 과정에 있다면, 1989년 이후 사반세기 동안 베를린장벽이 온몸으로 경험한 흥망성쇠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모범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 p.111
『흑서』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밝히는 데 만족하고 공산주의의 전면적인 부정과 비난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이웃의 비극을 내 집안을 살피는 계기로 삼았더라면,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는 없는지 돌아보았더라면, 그래서 자유주의 사회의 사회·경제적 폭력 역시 스탈린주의적 폭력과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더라면 『흑서』는 자유/자본주의에 매우 의미 있고 생산적인 연구가 되었을 것이다. --- p.174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많은 언어군의 원주민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통합적으로 추정하기 어려울뿐더러, 이에 따른 공존의 양상과 문제의 발생이 다를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던져준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관한 사고의 범위가 광범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한편, 인종적 계층질서에 관한 역사 서술자의 사고 및 문맥이 개척자의 기억과 연계된 시대·사회·계급 및 젠더적 특성과 관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서술의 인식과 필요성이 다시금 강조될 수밖에 없다. --- p.194
이렇게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보수의 이념적 보루인 반공주의와 거리를 두려 한다. 남북 관계와 국가보안법 문제에서 다소 유연한 입장을 개진한 이유도 과거 반공주의와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올드라이트가 반공주의를 절대시하고 북한을 척결 대상으로 보았다면, 뉴라이트는 공산주의가 자유시장경제에 부합하지 않기에 반공주의를 수용하며 남한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민주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 p.213
그러나 이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개인의 기억과 증언이 서로 어떻게 충돌하고 있으며, 일본의 근대적 국가 기구의 폭력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가 전제될 때 다양성을 보여주는 내러티브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대항 담론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유하가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고립된 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파편화된 경험의 불일치를 어떻게 재현하고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역사가들에게 던진 숙제라고 할 수 있다. --- p.234
재국정화 반대운동 역시 오랫동안 국가주의에 포섭된 역사 교육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국권 상실, 분단과 전쟁,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독재 정치를 거치면서 국가주의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렸다. 국정교과서는 그 산물이면서 이 경향을 심화 확장하는 데 기여했고, 재국정화가 가능했던 중요한 이유 역시 이 같은 국가주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정화·재국정화 소동은 뿌리 깊은 국가주의가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침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재국정화 반대운동은 바로 역사 교육에 내장된 국가주의에 맞서는 운동이었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