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감각이다.
머릿속이 근질근질 거린다.
신비한 감각이다.
광활한 우주의 삼라만상이 보이고, 느껴졌다. 오직 지영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하고, 저주스러운 감각.
그렇게 별빛이 찬란한 광활한 우주를 관통하는 시대의 명령. 그 명령은 지영의 뇌리에 살포시 안착하고, 각인의 과정을 거쳐, 지영을 잠식했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시대의 명령을 느끼고, 그 내용을 확인한 지영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현 시점에서 최악의 명령이 내려왔다.
‘뭐 이런 개 같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머릿속에 각인된 명령을 문장으로 바꾸어, 스케치북에 옮겨 적어보는 지영.
아이처럼 살아라.
최악의 명령이다.
***
유치원을 다녀온 지영은 방에 틀어박혔다. 밖에서 임미정이 간식 가져다줄까? 하는 목소리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지영의 눈동자에는 당혹, 당황을 넘어서 체념으로 인해 썩은 동태 눈깔처럼 변해 있었다.
‘왜? 왜 아이처럼 살라는 명령이 내려온 거지?’
여태껏 999번의 환생 중 999번의 명령을 받았지만 한 번도 이런 황당한 명령을 내려주진 않았다. 뭔가 특별한 걸 항상 내려줬었다. 그 시대의 의제, 혹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
예를 들면 전쟁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리 시대가 평안해도 그렇지, 아이처럼 살라는 명령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헛, 허허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예전에 지구의 끝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석영은 그 명령을 받고, 정말 십 년 이상을 준비해 지구 끝을 향해 출발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게?
‘지구는 둥글었지… 제기랄, 그때보다 더 황당하군.’
그래, 진리를 얻으란 소리였는데 정말 끝을 찾으라는 줄 알고 뱅뱅 돌았다. 농담이 아니라 지구 두 바퀴를 돌다가 객사했다. 나중에 환생하고 나서 지구가 둥글다는 얘기를 듣고는 미쳐 지랄 발광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그런 게 있을 거야. 찾자, 찾아야 돼. 안 그러면…….’
시대의 명령은 거스를 수 없었다. 거스르면 아주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해온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지영에게 명령의 이행을 강요했다. 그걸 계속해서 거부하면? 지영이라고 거부 안 해봤을 리가 없잖은가. 끝까지 거부할 시, 그 뒤는 항상 안 좋았다. 90% 이상으로,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부욱.
가방을 열어 스케치북을 꺼내는 지영.
일단 발단을 꺼내볼 생각이다.
오늘 그렸던 곰 그림. 민아의 발음으로는 꼬옴 그림.
두 다리로 서서 양팔을 벌린, 원시시대 곰 한 마리가 포효하며 사냥감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 정교하게 그리기보단 생동감이 넘쳤다.
‘이걸 그리고… 명령이 내려왔지.’
뭐가 문제였을까?
“빌어먹을, 문제고 나발이고 한 번밖에 안 오는 명령이 이딴 걸로 와……? 아오…….”
뭔가 거창한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세계 최강의 부국, 강국으로 만들라는 허무맹랑한 명령 같은 것만 아니라면 그나마 괜찮았을 거다.
지영이 내심 바랐던 건 사람답게 살아라, 혹은 역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 하나를 남겨라 등등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는 명령이었다. 그건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 이 시대면 스포츠 스타도 괜찮고, 가수도 괜찮고. 정치인도 괜찮고 뭐, 그런 걸 명령으로 줬을 수도 있잖아. 아, 정말…….’
슥, 슥슥.
나한테 왜 그래요?
지영은 이 명령을 내려주는, 신이라 예상되는 존재에게 글자로 물었다. 하지만 당연히 신의 대답은 없었다. 대답은커녕, 곰 한 마리가 쿠앙! 하고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벌러덩 드러눕는 순간, 밖에서 지영아, 밥 먹으렴! 하는 임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지영은 명령에 충실하기 위한 활발한 대답과 함께 스케치북을 들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기 무섭게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발판을 밟고 의자에 착석!
식탁에는 뭇국, 햄 구이, 요즘 더럽게 비싸다는 계란말이, 시금치 무침, 콩나물 무침 등이 있었다. 다 지영이 선호하는 반찬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으렴.”
다행히 임미정의 음식 솜씨는 좋았다.
후룩, 살짝 간이 심심한 뭇국을 한술 떠 넣자, 무겁던 마음이 사르르 풀려가는 것 같았다. 임미정이 당신의 밥과 국을 떠서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지영아, 오늘 유치원 어땠니?”
후룩.
“재밌었어요! 아! 오늘 그린 곰 그림!”
“어머, 곰 그렸어?”
“네!”
지영은 스케치북을 임미정에게 건넸다. 임미정을 수저를 내려놓고 기대에 찬 미소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잘 그렸다 하시겠… 응?’
힐끔 눈치를 보던 지영도 수저를 멈췄다.
기뻐할 거라는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임미정은 그림을 보는 순간, 미소는커녕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게 너무 눈에 뛰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슬그머니 말문을 여는 지영.
“이 그림, 지영이가 그린 거야?”
“네…….”
“누가 그려준 게 아니고?”
“네…….”
“…….”
임미정은 한참을 그림만 바라봤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림을 너무 몰두해서 보는데, 그걸 바라보는 지영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이의 본능적인 위기감이라 해도 좋고, 999번의 삶을 산 환생자의 감이라고 해도 좋다. 일이 틀어졌을 때 풍겨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영은 젓가락도 내려놓았다.
밥은 물 건너갔다.
“지영아.”
“네… 잘못했어요…….”
아이답게 일단 죄송하단 말부터 꺼내보는 지영. 그러나 임미정은 여전히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게 아니야 란 대답을 해줬다. 이후 잠시의 침묵 뒤 열리는 다시 들려오는 굳은 목소리.
“곰 그림 잘 그렸어. 그런데 지영아, 지영이는 이런 곰 어디서 본 적 있니?”
“네? 그, 그게 티비에서…….”
“티비에서?”
“네…….”
“지영아, 이거 누구 보여준 적 있어?”
“그, 그게… 민아라고… 친구가 그려 달래서요… 그 친구는 봤어요.”
“울었겠네?”
“…….”
대답은 안 했지만 정답이다.
민아는 보자마자 아주 펑펑 울어댔다.
“이렇게 무섭게 그렸으니 민아라는 친구가 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런데 지영아, 그거 아니?”
“네?”
“이건 곰이 아니야.”
“네, 네? 어… 곰 그렸는데.”
“여기 봐봐.”
임미정은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돌려서 지영이 보기 편하게끔 해줬다. 지영은 곰 그림을 빤히 바라봤다.
‘왜 곰이 아니지? 난 분명 첫 번째 생에서 만났던 곰을 기억해서 그린 건데?’
생동감 넘치는, 흉포한 곰 그림을 빤히 바라봐 보고는 있지만 역시나 이게 곰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긴 힘들었다.
“모르겠니?”
“네. 잘 모르겠어요.”
“발을 봐봐.”
“발 요? 음… 어, 어?”
지영은 임미정의 말을 듣고 나서야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달랐다. 보편적으로 짐승의 발이 아닌… 인간의 발 형태였다. 그리고 앞발은 사람의 손에 가까웠다. 곰은 기본적으로 사족 보행이다. 그래서 앞발, 뒷발로 정의한다. 손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영이 그런 그림은 다 곰인데, 발과 손이 달려 있었다. 가장 특이한 건 사람의 손이라고 생각될 손을 그려놨다.
“지영아, 곰은 손이 없어.”
“어… 네, 그렇게 배웠어요…….”
“티비에서 이런 곰이 나왔었니?”
“…….”
지영은 거짓말에 대한 추궁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못 봤다. 저 곰 그림의 베이스는 자신의 첫 번째 삶에서 만났던 흉악한 식인 곰이 베이스니까. 지영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원시시대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곰은 야생에 맞춰 진화했다. 인간의 진화처럼 말이다.
‘아니면 단일 종이고, 벌써 멸종했을 수도 있겠지. 나 진짜 멍청하다… 뭇국에 코 박을까? 아아…….’
그런데 지영은 그걸 몰랐다. 손발을 제외하면 누가 봐도 곰이니 당연히 기억도 그걸 곰으로 알고 있었다. 두 개의 기억에서 오류가 난 게 아니라 시대 배경이 아예 다르니 지영이 그런 건 ‘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 이런 멍청한… 그래서 아이처럼 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건가? 하지만 여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지영은 어느 시대에도 신동 소리를 들었다. 생각해 봐라. 언어를 배우는 것도 빠르지, 애어른처럼 굴지, 배움도 빠르지, 그러니 신동 소리를 듣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과하게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아이처럼 살라는 시대의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영아.”
“네…….”
“지영이가 그림 이 정도로 잘 그린 건 엄마도 잘 몰랐는데?”
“아…….”
또 걸렸다.
지영의 방에 그림 그리는 기본적인 도구가 있긴 했지만 지영은 거기다가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지 않았었다. 그저 조금 잘 그리는? 대충 느낌 있게 끄적거리는?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림도 몇 점 안 그렸다. 애초에 그림 도구는 지영이 너무 흥미를 끄는 게 없어 채워 넣은 소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기억을 떠올려 그렸다.
그러다 보니 정교함과 섬세함이 살아났다. 거기에 환생자의 기억이 더해지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생동감이 실렸다. 그 결과, 이런 사달이 벌어졌다.
‘큰일 났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