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나 외국어가 들려오는, 예술가와 여행자들의, 지중해와 캘리포니아가 뒤섞이는, 정부와 기업이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그 거리의 끝에서 돌연 역이 나타났을 때 나는 당황하여 외친다. 나는 너를 알아! 거리가 답한다.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착란의 경계에서 나는 겨우 중얼거린다. 저 말들을 손에 쥐지 않겠다. 더위와 갈증이 빚어낸 내 머릿속 요설을 무시하겠다. 눈앞에서 오래된 역이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거리가 나를 향해 소리쳐서는 안 된다. 단어들이 눈처럼 쌓여서는 안 된다. 이 정신 나간 거리를 통째로 뜯어내어 문장 속에 구겨넣고 싶다는 욕망은 금지되어야 한다. 감정은 불에 태워 하수구에 흘려보내야 한다. 내 앞에서 반복되는 저 거리와 꽉 찬 사람들의 비극을 무시해야 한다. ---「더 나쁜 쪽으로」중에서
그러고 나서 한동안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오래된 부부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닥쳐오기 전까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 현실? 글쎄, 뭐 그런 거. 우리가 ‘유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나는 그가 불안해 보일 때마다 다 잘될 거라 위로했다. 그러면 그는 더 불안해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또 하루가 갔다. 그렇게 우리는 지냈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국이 닥치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든다. 허용된 시간 동안 우리는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라고 해도. 하지만 내일은 저멀리 있다. ---「비, 증기, 그리고 속도」중에서
점멸하는 빛의 섬들, 그것들을 포함하는 수천수만 컷의 지도들, 시간은 흐르고, 불일치들을 오가는 불명확한 지도들이, 그것들이 다시, 내가, 아마도? 하지만 어떤 지도에도 내 위치로 삼을 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겐 하나의 점도, 선도, 숫자도, 즉 어떤 위치값도 없다. 분명 나는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그날 영화관의 기억, 1995년 7월 5일, 아빠한테서 나던 담배 냄새, 그 빛의 다발들이 여전히 내 눈앞에서 폭발하고 있는데…… ---「지도와 인간」중에서
인간혐오자인 내가 어떻게 인간인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 그녀가 나에게 친절하든 뭐든 귀엽든 나발이든 그녀는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당당하게 방으로돌아와 카레를 먹었다.
그 버블티 여자 사건은 큰 교훈이 되었다. 그뒤로 나는 어지간한 상황에서 마음이 풀어지려는 순간을 곧바로 혐오 기제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좀더 성숙한 것이다. 누군가가 아주 역겨울 때도, 누군가가 지나치게 따뜻할 때도 효과가 있었다. 거참 자랑스럽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나는 단지 내 마음이 편하자고 인간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혐오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혐오할 가치가 있다. ---「카레가 있는 책상」중에서
두 진수에 의해 시작된 기이한 풍습은 놀랍도록 빠르게 한국 부르주아의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혁명이란 이름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이한 습속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지만 일반인들의 눈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기이해 보일수록 좋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기를 바랐다. 더 우스꽝스럽게, 뼛속 깊이 다르기를 원했다.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뭐든지 좋았다. 그렇게 한국 부르주아의 새로운 3대는 새롭게 기이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