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물에 젖은 스펀지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같았습니다. 흐릿한 그림자가 눈앞에서 아른아른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고래 모양을 닮았습니다.
“누, 누구야?”
“나는 네 마음속에 사는 레모라야. 지금껏 내가 널 게으르게 도와주었잖아.”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만날 게으름뱅이라고 놀림 받았는데, 그게 레모라 때문이었다니.
레모라에게 자꾸 화가 나고 약이 올랐습니다. 무슨 방법을 찾아보고 싶던 중, 해군인 한모 외삼촌이 휴가를 나왔습니다.
“나도 들은 이야긴데, 바다에 나간 해군들은 폭풍보다도 레모라를 더 무서워했대.”
“외삼촌, 그럼 나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비밀의 열쇠 같은 걸 찾아 내야지! 고래는 바다에 사니까, 동해바다에 가서 빠뜨리면 되겠네. 레모라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거야.”
바닷가는 얼씬도 안 하는 한모에게 동해바다라니.
“한모야, 태권도 가자.”
주희가 현관에 놓아 둔 파란 우산을 들고 와서 한모 앞에 들이댑니다. 순간, 레모라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레모라는 파란색을 보면 사라지곤 했습니다. 파란 운동복, 파란 우산, 파란 원피스.
태권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모는 문방구에 들러 파란 색종이 세 묶음을 샀습니다. 종이고래를 접어 여기저기 놓아둘 계획입니다. 파란 색깔을 보면 레모라가 절대로 나타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요.
“맞아. 비밀의 열쇠는 바로 파란색이야!”
순간, 한모 눈앞에 넓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와, 언제 이렇게 많이 만들었지?”
종이고래를 꺼내 보는 주희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습니다.
“너, 진짜로 무슨 소원 있는 거니?”
한모는 입안이 근질근질 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동해바다로 떠나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한모 가슴은 바람을 먹은 풍선 같았습니다. 그동안 접어놓은 파란 종이고래를 볼 때마다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자, 받아라!”
한모가 종이고래를 레모라 앞으로 던졌습니다. 레모라는 꿈쩍도 안 했습니다.
“레모라, 넌 도둑이야. 허락도 없이 내 몸에 들어왔잖아!”
“난 도둑 아니야,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린 만났거든. 넌 그때부터 바다에 사는 나를 네 가슴에 가둬 둔 거야. 그러니까 도둑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란 말이야, 너!”
작은 사내아이가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고래 모양을 한 그림자가 아이의 다리를 잡고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무서워, 무서워! 아이는 물이 무서워 허우적거렸습니다.
“맞아! 그 사고! 사고!”
오래된 상처딱지를 떼어내듯 한모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화가 난 레모라가 불칼을 입에 물고 뒤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카멜레온처럼 빨간빛, 노란빛, 연둣빛, 초록빛 불칼을 휘두르는 레모라. 한모는 출렁거리는 동해바다에 당장 레모라를 쳐 넣기라도 할 것처럼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한모가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한모는 외삼촌 품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었습니다.
“외삼촌, 고마워!”
“갑자기 무슨 말이니. 벌써 결투를 끝내기라도 한 거야?”
한모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비밀의 열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한모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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