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는 진욱 대신 변명해주며 그의 발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버스가 예고도 없이 ‘덜컹’ 움직였다.
“어, 어!”
순간 중심을 잃은 유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고는 절대로 의도치 않았지만, 무릎이 팍 꺾이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p.28
“악!”
유미의 몸이 카트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케이크가 풍선처럼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가는 유미를 진욱이 다급하게 팔을 뻗어 가까스로 잡았다. 1초도 안 되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유미의 눈동자가 진욱을 향했다. 이 여자, 울어?
유미의 눈물에 진욱이 살짝 흠칫하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 p.46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을 들키기 싫은 유미는 재빨리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멈출 수 없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괜찮아요?”
그녀의 눈물에도 아무 동요 없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진욱이 툭 던지듯 물었다. --- p.59
“같이 한잔할래요?”
그가 그녀를 향해 와인 병을 들어 보였다.
“같……이요?”
진욱은 대답 대신 이리 오라고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급작스러운 제안에 유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p.72
동전을 바라보며 생글거리던 유미는 갑자기 모래가 묻은 동전을 옷에 쓱쓱 닦더니 불쑥 진욱에게 내밀었다.
“자요, 선물.”
진욱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 ‘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으면서…….’라고 다그치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기름 값 없다고 적선하는 겁니까?”
“아뇨.”
유미는 기분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행운을 주는 거예요.” --- p.76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유미의 눈가를 맴돌던 손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그러쥐며 진욱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는 여자가 예뻐 보이는 것도 처음이고.” --- p.78
근처 바닷가를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자, 멀리 절벽까지 가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걸음을 빨리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진욱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보니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보디 샴푸의 향이 바닐라와 코코넛이라는 건 알면서도 정작 그녀의 전화번호도,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 p.94
문이 열리고 유미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진욱은 이상한 힘에 이끌려 스르르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유미도 문을 향해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찰나, 진욱의 눈에 유미의 얼굴이 스치듯 새겨졌다.
“하!”
서, 설마? 그의 심장이 쿵! 저 밑으로 떨어졌다. --- p.105
“그래, 그쪽은 그동안 아주 잘 살았나 보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동안 남자 친구도 사귀고 말이야. 난 아직도 그날 아침만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데…….
유미의 사진을 무섭게 노려보던 진욱은 포스트잇을 와락 구기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 유, 미.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 p.134~135
말도 안 돼!
흐릿한 기억 속에 이제는 꿈속에서만 얼굴을 보여주던 남자가, 사람 홀리게 멋있던 그 남자가, 눈앞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이 컸나 봐! 이젠 막 헛것이 보이네……. 하하하, 왜 그 남자가 본부장 집무실에 있는 거지? 나, 드디어 미친 건가?
유미는 금붕어처럼 눈만 깜빡거리며 멍한 얼굴로 진욱을 바라보았고, 진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심한 눈빛으로 유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 p.143
“기대되는군요.”
진욱은 유미가 내려놓은 도시락 통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네. 본부장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여……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리군요.”
도시락 뚜껑을 열고 흐뭇한 얼굴로 유부 초밥을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를 향해 찡긋 윙크를 날렸다.
“우리 앞으로 이렇게 ‘매일매일’, 봅시다.” --- p.157
유미는 혀를 쑥 내밀어 입술에 묻은 토마토 소스까지 날름 핥아 먹었다. 핑크빛 혀를 위아래로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이며……. 그런 행동이 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르는 채.
진욱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 여자, 그때도 그러더니. 이제 보니까 완전 고수잖아! 진욱은 유미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 p.177
“하나만 묻자. 그날 그렇게 가버린 이유가 뭐지?”
유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지금 그렇게도 궁금하세요?”
진욱을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이유가 뭔지…….” --- p.205
진욱은 갑자기 손을 뻗어 유미의 어깨를 와락 끌어당겼다. 전혀 무방비한 상태였던 유미는 안기듯 진욱의 품으로 쓰러졌다.
“난 이 여자가 해주는 밥만 먹어. 내 전담 영양사거든.” --- p.244
“공은 공이고 사는 사,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품지 말아요. ……이유미 씨 말대로 우린, 사귄 사이가 아닌…… ‘원나잇’이니까.” --- p.258
속는 셈 치고 손을 내밀자, 진욱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걸 왜 저에게 주세요?”
유미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백 원과 진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행운을 주는 겁니다. 이거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동전이에요. 훗, 나 오늘 운 되게 좋은 건가?” --- p.296
“그거, 나한테만 하는 거지.”
헉! 그런가? 유미는 그제야 자신이 진욱 앞에서만 딸꾹질을 터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 정말! 맹세코 그녀 역시 지금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바라만 보자, 진욱의 입꼬리가 점점 위로 말려 올라갔다.
“나한테, 떨려?” --- p.383~384
유미는 아기가 엄마의 손을 잡듯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새근새근 잠든 진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간질간질 설렜다.
오랫동안 진욱을 내려다보던 유미는 말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바깥 풍경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 p.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