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들어오면 조선 정치사에서 하나의 ‘투어(套語)’로 자리 잡게 된 문구, 즉 “공론(公論)이 공경(公卿)에게서 행해지지 않으면 대각(臺閣)으로 돌아가고, 대각이 못 맡으면 초야(草野)로 돌아간다. 공론이 공경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대각에 있게 되면 어지러워지며, 환시(宦侍)한테로 돌아가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는 명제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이후 정치운영의 한 기준이 되었다.--- p.26
각 지방의 사족들은 향중공론이라 할 향론에 따라 일정 범위 이내의 사족만을 엄선하여 향안을 만들고, 이 향안에 입록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향회를 구성하여 한 고을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향회는 크게 1년에 1-2회 정기적으로 열리고 전 향원이 참가하는 대회(大會)와, 전직 임원과 일정 연령 이상이 중심이 되어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열리는 소회(小會)가 있었다. 향회를 개최하거나 긴급한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향청에서 향원을 대상으로 통문을 돌렸다.
향회는 유교적 윤리의 실천이나 교화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원 참여를 놓고 권점을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것, 그리고 주론지원인 향로(鄕老)·향장(鄕長)·향유사(鄕有司)의 소견(所見)이 각각 다르면 정론(正論)을 따르고, 그러고도 정론이 둘로 갈라지면 종다시행(從多施行), 즉 다수결에 따른다는 약속조목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 공론을 따르면서도 그것에 일정한 규약을 두어 합의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공론정치 전개의 또 다른 한 특징을 발견한다. --- p.47-48
19세기 향회는 주로 부세 문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져 왔는데, 민란의 조직기반이 된 향회의 경우 기존 수령의 부세 자문기구로서의 향회와 구별하여 요호부민층(饒戶富民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간 향회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고, 기존의 향회 가운데 관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작은 향회’와 아직도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향회’로 구분하여 후자에서 반관적(反官的) 저항의 움직임이 나온다고 보기도 하며, 아예 저항조직을 ‘민회’로 차별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민회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하자는 주장은 ‘대·소민인’이 같이 모여 거사를 진행하는 가운데서도 일반 민은 과거와 같이 동원되는 수동적 지위로서의 중민(衆民)에 머물지 않고 독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p.102
19세기 일련의 사태 진전과정에서 농민들은 동리 단위에서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등소(等訴)를 올리는가 하면, 민란기에는 읍, 면, 리(동) 단위에서 지배층 피지배층을 떠나 대·소민인들이 공동으로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전통 위에서 기존 향회와는 또 다른 의사결정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모이는 장소나 방법에 따라 읍회나 도회로 불리기도 하였고, 같은 향회란 명칭이 사용되는 경우에도 반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가운데는 ‘민론’을 반영하는 ‘민회’라는 명칭의 집회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1893년에는 한 고을을 넘어서 삼남지방을 넘어 온 지방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기 쉬운 충청도 보은에서 전국적인 ‘민회(民會)’를 개최할 수 있었으니, 이는 민중의 탄생으로 19세기 정치사가 이룬 커다란 성과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시대적 경험은 기억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정치적 현실에 갇혀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대·소민이 참여하는 ‘거족적’ 공론의 장은 사라진 듯 보였다. 이 거족적 공론장은 일제의 압박하에 ‘천도교’ 등을 매개로 다시 살아났지만 아직 독립된 민족국가에 자리 잡을 수가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군이 물러간 자리에 새로이 들어앉은 독립협회는 친일 개화파나 동도서기론을 내세운 보수 관료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정치의 공백을 틈타 안경수, 정교 등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을 기도하는가 하면, 대중적 기반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만민공동회 역시 러시아를 견제코자 하는 일본(영국, 미국)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지만 그 집회의 범위는 종로거리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 삼남지방에서 볼 수 있었던 대·소민들의 동향이나 1904년을 전후한 서북지역에서의 ‘민회’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주민의 의견들은 ‘민론’으로 새롭게 자리 잡아 나가고 있었다.
--- p.159-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