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관계 맺는 게 서툴러요. 자랑이 아닌 거 아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아요. 누군가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내 안의 결함이 그걸 막아요.”
“결함?”
“속도 조절, 강약 조절을 잘 못해요. 언제나 너무 빠르거나 늦거나, 아니면 너무 깊거나 너무 얕거나.”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실패로 돌아가지는 않잖아요. 난 언제나 거의 실패였던 것 같아요. 상대방이 질릴 정도로 집착하거나 아니면 경계하거나 그랬어요. 자랄 때 부모한테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한 아이는 커서도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힘들다는 말이 맞나 봐요.”
필립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냥 살게 되더라고요. 만나서 웃고 떠드는 친구들도 있어요. 메일 주고받고 메신저도 하고. 결혼식에도 가주고. 그런데 마음을 열고 정성을 들였던 친구는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상대방이 해주길 바라지도 않았고요. 그렇게 살다 보니 우울하게 편하더라고요.”
우울하게 편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복잡하게 얽혀서 감정소모를 하느니 차라리 외롭게 사는 게 낫다?”
“말하자면. 의도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론 그런 셈이죠.”
남보랏빛으로 변한 하늘을 바라보며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빌딩들은 환하게 조명을 밝히고 광고판은 화려하게 번쩍였다. 필립은 불빛에 이끌려 날아가는 나방처럼 천천히 일어나 난간에 몸을 기대고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광고 속의 자전거를 탄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캔커피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내 결함에도 불구하고 다가서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광고 속의 남자가 여자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다시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모르겠어요. 전생에서 우연히 한 번쯤 스쳤을까요? 이상하게 그 사람을 보면 여기가…….”
필립은 말을 잇지 못하고 광고 속의 젊은 연인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여기가…… 싸해져요.”
묵묵하게 필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도 싸했다.
“그 사람 앞에선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편안했어요. 그 순간만큼은 그냥 나였던 것 같아요. 서필립이었고 서혜준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한테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자꾸 나를 보여주게 돼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필립에게로 걸어갔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적어도 실패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러워요.”
“필립…….”
필립의 어깨를 돌려 얼굴을 감쌌다. 영원히 되풀이되는 꿈처럼, 광고 속에서 또다시 젊은 남자가 나타나 연인에게 캔커피를 건네주었다.
“그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결함 때문에 중간에 망쳐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가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필립은 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 감아요. 필립.”
나는 광고 속의 남자처럼 고개를 숙여 필립의 하얀 이마에, 파닥거리는 속눈썹에, 차가운 콧등에, 꼭 다문 서늘한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욕심을 부려도 될까? 필립이 조금은 나중에 알아도 괜찮을까? 아니, 말하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완벽하게 속이고 싶다. 영원히. 파트라슈가 벤치에서 풀쩍 뛰어내려 컹,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