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빠사나 ]
세존이 위대한 불법을 열고 위빠사나라는 깨달음의 열쇠를 내려준 지 어언 2천5백여 년이 흘렀건만, 왜 그것의 효용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일까?
그건 위빠사나의 열쇠를 거꾸로 잡고 자물쇠를 열려 하기 때문이다. 바로 부처가 되려는 마음이다.
일단 앞에 놓인 강을 어떡하든 건너야 한다. 그 뒤에 배마저 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른다. 수많은 분파가 있어도 이 논리만은 확고한 진리로 자리매김 해 있다. 이것이 바로 거꾸로 된 열쇠이고, 이로써 싯다르타의 위빠사나는 완전히 구겨졌다.
위빠사나엔 순서가 없다. 깨달음에 지소선후知所先後가 개입하면 생각은 편중되고 공명은 깨진다. 행여 고된 수행을 통해 일각一覺을 얻더라도 그것이 化로 되는 데에는 걸림이 있게 된다. 化가 미미한 覺은 문고리이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래서 위빠사나가 아닌 반야로써 깨달음을 거머쥐는 법방에는 그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위빠사나, 여기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오로지 하나만 있다. 그건 자유이다.
신선이나 천신, 나아가 부처가 되려 하지 말라. 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념이 폐쇄이고 짐덩어리이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폐쇄 인자들을 느껴 보라.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내 멋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홀가분하게 있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조물주처럼 모든 것을 내 생각대로 하고 싶은 마음…. 이렇게 일체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구도求道이다. 이 마음을 따라가면 그것이 구도행求道行이다.
자유를 향한 본연의 마음을 외면하고 득도, 성불, 각성, 대각, 空… 같은 것으로 방향을 틀면 곧바로 폐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위빠사나의 열쇠가 뒤집히게 되는 것이다.
有·無·空의 화두를 잡는 목적은 자유롭게 되기 위함이다. 실존에 대해 모르니까 갑갑하지 않던가. 그러니 일체의 관념들로부터 훌훌 벗어나서 자유롭게 대상을 바라보자. 한 점의 걸림 없이 외계를 대하게 될 때 위빠사나의 열쇠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자문해 보자. 그동안 道를 많이 닦았을 텐데, 솔직히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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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수련과 공명 ]
앞서 말했듯 인체의 어느 한구석도 기운이 저장되는 곳은 없다. 단전은 기운의 저장소가 아닌 기운의 조절 장치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희미했던 4차원에 대한 인식을 보다 또렷이 할 수 있다.
단전이 배꼽 세 치 밑의 단도태로 이루어지게 되면 마치 수동으로 펌프를 돌리는 것처럼 매번 의념을 주어 억지로 돌려야 한다. 그런 수고스러움이 없으려면 쌍도태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인간이 원래부터 지닌 본연의 단전이다.
축기 과정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의식이다. 수인手印을 통해 기운이 들어와서 아랫배에 쌓인다는 생각으로 하면 안 된다. 수련 초반에는 조금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훗날 운기 과정에 들어가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축기 과정에서 주안을 둬야 할 것은 관념을 털어내는 것이다. 한 번에 몽땅 털어낼 수는 없으니, 일단 사방팔방 모든 것이 氣 한 덩어리라는 생각만 갖도록 하자.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듯, 온통 氣 천지인 곳에서 氣를 마시고 뱉고 하면서 氣에 친숙해진다는 느낌으로 행공하는 편이 좋다.
대개 [氣수련=몸수련]으로 놓고 마음 수련과 구분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氣수련은 순전한 마음 수련이다. [氣수련=몸수련]이 되면 그 순간 氣는 증발한다.
나는 위빠사나 수행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대안법을 찾았다. 그 정답이 바로 氣이다. 氣에 자유롭게 되면 위빠사나는 저절로 된다. 축기나 운기 과정 자체가 위빠사나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에서 제시하는 있는 그대로의 공명심共鳴心, 이것이 氣수련의 핵심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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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의 벽 ]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으면서 4차원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죽으면 끝이라는 유물론의 비중이 꽤 크기에 사후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에 국한한 얘기이다. 그들은 죽으면서 神(영혼)이 되어 4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대단한 착각이다. 죽더라도 도로 3차원이다.
차원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고, 다만 의식의 폐쇄성에 따라 3차원, 4차원으로 느껴질 뿐이다. 따라서 죽은 뒤에도 자신의 수준에 따라 가기에, 이생에서 3차원적 사고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다 질서의 형태가 다른 3차원으로 옮겨 가게 된다.
사람들은 저승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공간을 점프하는 모습을 그린다. 더 심하면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초월적인 모습도 덧붙인다. 그러면서 이런 걸 일러 4차원이라고 한다.
정말 웃음만 나온다.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어 시공에 자유로워져도 그건 3차원이다. 웜홀(worm hole)을 통과해 순식간에 우주 반대편으로 이동하거나 시간의 흐름을 자유롭게 조정해도, 그것 역시 3차원의 연장이다. 3차원에서의 활동 범위가 더욱 커지고 자유롭게 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4차원은 그렇게 쉽게 연상될 수가 없다. 만일 상상으로 얼마든지 4차원을 묘사하고 그것을 이해한다면, 인류는 이미 고차원 영성인류인 것이다.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4차원은 3차원의 질서가 더욱 다양해진 모습이다. 사실 4차원을 대표하는 초입체를 표현한 이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죽은 뒤에도 3차원이라 하는 것이다. 차원은 죽고 사는 것에 관계없이 자신이 지닌 의식의 크기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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