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벽을 두드렸다.
톡, 톡톡톡, 톡, 톡톡톡, 톡, 톡톡톡.
가벼운 두드림이었지만 제아에게는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천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 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둘뿐이었으니까. 그녀 자신과, 한때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남자. --- p.18~19
“10년 전 그때처럼. 내가 키스라도 할까봐 겁이 나나 보지?”
추억을 거침없이 들추어내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달콤하고 뜨거운 숨결이 느릿하게 애를 태우듯이 귓불로 옮겨갔다.
“오빠는 여동생에게 키스하지 않거든.” --- p.20
단정한 그의 이마를 가리고 있던 흑색 머리칼이 쏟아져 제아의 이마를 간질였다. 유혹하듯이
자극적으로 은밀하게.
“문제아, 아직도 내가 오빠이길 원해?”
오빠를 원해, 미치도록.
제아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간절함과 달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이율배반적이었다.
“이젠 필요 없어. 오빠 따위.” --- p.23
“봐. 네 몸은 날 기억하잖아. 그런데 왜 깨끗이 잊었다고 해. 사람 화나게.”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제아에게.
“나를 오빠로 받아들이던지. 남자로 받아들이던지. 선택은 자유야.”
지독히도 사근사근한 음성이 스며든다.
“너 때문에 돌아왔어.”
믿기지 않을 말들을 쏟아내며 아찔한 선언을 한다.
“돌아온 이상 난 절대 네 곁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든 날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 p.54~55
대답, 들었으니까. 품으로 끌어당기자 따스한 체온에 이끌렸는지 기다렸다는 듯 제아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잦아드는 흐느낌.
“내가 여전히 너에게 미쳐 있다고 하면.”
“…….”
“넌 지금도, 나에게 미쳤다고 할까.”
“…….”
“내가 여전히 널 사랑한다고 해도.”
제아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독백과도 같은 고백을 한 도준은 이제 그만 사라져줘야 할 때였다. --- p.69~70
가을이 지나가는지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이 꽤 차가웠다. 제아도 사실 말도 안 되는 고집이라는 걸 잘 안다. 좋은 차를 놔두고 그가 뭐가 아쉽다고 버스를 탈까.
그럼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 건 심술이었고, 시험이었다. 너무 변해버린 그에게서 옛날의 이준이 남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이나 고집도 항상 묵묵히 들어주던 게 이준이었으니까.
심장은 두근두근거리고 손끝이 자꾸만 오그라든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해. 걸을 때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하게 스치는 서로의 손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아, 어색해. --- p.93
벌떡 일어나 옆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제아가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보드랍고 따스한 고양이 같은 느낌이다. 담뿍 안겨 들어오는 작은 체구에 쌔근거리는 숨소리. 희미한 술 냄새에 섞인 복숭아 향까지도. 너무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시선을 내리니 살짝 벌어진 제아의 다리가 보인다. 옅은 한숨을 내쉰 도준은 재킷으로 다리를 덮어주었다.
“이런 모습으로 자면 어떻게 하라고.” --- p.97
“서식이 틀렸어.”
나긋나긋한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길고 곧은 남자의 손이 양옆에서 뻗어 나와 방금 전까지 그녀가 두드리던 키보드를 능숙하게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제아의 얼굴 옆으로 스윽, 나타난 도준의 얼굴.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갇힌 채 제아는 그와 함께 같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긴장감에 솟아오른 어깨의 떨림을 느낀 걸까.
“긴장하지 마. 닿지 않았으니까.” --- p.124~125
배경과 재력이 없어 대우받지 못한다면, 그 배경과 재력은 그가 만들어주면 된다. 너를 생각하면서, 너를 위해서 이렇게 독하게 10년을 달려온 나야. 널 위해 달려온 나를, 넌 이용만 하면 돼. 그 메시지를 알아들은 걸까? 그게 아니면 그의 말이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걸까? 마침내 고집스럽게 다물린 제아의 입이 열렸다.
“내가 세게 밟았다고 울지나 마시죠, 한도준 씨.”
“이제야 나의 제아답군.” --- p.128-129
“……오빠 믿어. 잘 자!”
10년 만에 듣는 그 말에 도준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며, 진심을 다해 마음으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너만 믿어.’
지금 그에게 38선 너머에 있는 존재는 이브의 사과와도 같은 금단의 열매였다. 금단이라서 더욱더 매혹적인 그 열매.
38선을 넘어오는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손만 뻗으면 서로가 닿을 곳에 있건만, 제아는 정말 잠이 든 것이다. 쌔근거리는 제아의 숨소리를 들으며 도준은 그제야 눈을 감았다. --- p.146~147
문이준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남자든 오빠든 상관없었다. 그냥 그이기 때문에 좋은 거다. 그토록 부인을 하며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제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지금도 너무 욕심이 나…… 오빠가.”
이젠 온전하게 그녀만의 문이준이 될 수 없는 한도준인데. 그런데도 미치도록 탐이 난다. --- p.159~160
“인정해. 내가 쉬운 남자라는 거 말이야.”
순순히 인정하는 도준의 한마디에 잡다한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에서 난잡하게 뒤엉켰다. 그 감정들을 내보이기 싫어 제아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 쉬운 남자라는 거, 너한테만 해당되는 거 제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푹 떨어진 시야로 도준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치고 들어와 턱 끝을 잡아 올렸다.
“난 네게 쉬운 남자, 넌 내게 어려운 여자.”
손끝에 힘을 주어 강제로라도 눈을 마주 보게 했다.
“기억해내. 그걸 정해준 게 바로 너니까.” --- p.206
“날 남자로 느낄 때까지 내가 널 미치도록 자극할 생각이거든.”
전기라도 감전된 듯 찌르르, 온몸에 떨림이 전해졌다. 가까이 다가온 더운 숨이 제아의 입술을 데운다.
“문제아.”
맙소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젖은 숨결과 동반된 제 이름이 이렇게나 아찔할 줄이야. 제아의 심장이 폭탄을 맞은 것 같다. 흔들리는 동공의 무너짐을 눈치챘는지 도준의 눈가가 부드럽게 휜다.
“나란 남잘 사랑해봐.” --- p.216~217
“추워…….”
탁하게 흐려진 음성이 도준의 창백한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입술이 떨리는 간절한 그 중얼거림에 팔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답지 않은 약한 모습에 결국 또 흔들려버리고 말았다. 제아의 팔이 드넓은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한도준 씨, 딱 오늘만이야. 내가 따뜻하게 해주는 거.”
그토록 강인하고 완벽한 남자가 왜 자꾸 저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허점을 보이는 건지. 그래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고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그 대신 절대 깨어나서도 기억해서도 안 돼.”
---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