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콘텐츠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행복이 담겨 있을까.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누군가에겐 사소한 일에도 조용히 분노할 수 있는 사람, 같은 마음을 오랜 세월 꾸준히 쌓아내는 사람. 그가 만드는 빵에는 고스란히 그런 그가 들어 있었다. 그런 빵 같은 삶이 많아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온갖 곳을 다시 채운다. 또 다시 질문거리를 한아름 떠안았지만 빵 봉투 속에 아직 뜯지 않은 답안지도 함께 받은 기분이다. ---「맛보다 : 파리에서 만난 제빵왕」중에서
수정이었다. 아니, 쟤까지 왜 저러는 걸까. 옆에 있던 친구는 한층 더 기세등등해져서 나를 ‘아직도 엄마랑 여탕 가는 애’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비교 우위를 힘써 강조했다. 이놈은 그렇다 치고, 이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동참한 수정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충격적인 말을 던져놓고 자전거를 탄 채 싱글거리며 드륵드륵 주변을 맴도는 모습이 그리도 야속할 수가. 한데 그 무책임한 발언보다 더 이해 안 되는 건 수정이의 행동이었다. 나를 향해 한쪽 눈을 계속 찡긋거리는 게 아닌가. ---「믿다 : 삶으로 말하는 사람」중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세계에는 기쁘다, 슬프다, 말할 일이 별로 없다. 하루를 꼬박 보내도록 시원하게 웃을 일 하나 없는 날이 대부분이고, 슬픈 기분이 들어도 울기엔 좀 애매한 그런 순간들로 가득하다. 차라리 눈물 나게 슬픈 일이 있다면 시원하게 한번 울어버리기라도 할 텐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됐다면 ‘일상’이라는 말에 ‘건조하다’는 수식어가 이리 자주 붙지 않았겠지. 해서 사람들은 TV를 본다. 선택과 연출,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한 TV에는 기쁜 일, 슬픈 일이 가득하다. 별스럽지 않은 농담도 화려한 자막과 가짜 웃음을 삽입해 웃을 만한 것으로 바꿔 보여준다. ---「위로하다 : TV를 봤네」중에서
결국 10대에 했던 고민의 답은 무대만 바꾸어 다시 나를 이끈다.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당장 발끝의 할 수 있는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눈을 들었을 때 보이는 풍경이 부디 부끄럽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끌다 : 정말 아니다 싶은 것」중에서
누구나 관계에 서툴고 어렸던 시절이 있다. 어른이 된다고 딱히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영화의 홍보 카피는 사실 “우리 모두는 이불킥을 할 만큼 지질했던 기억이 있다”를 예쁘게 칠해놓은 말에 다름 아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이유는 그저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나 영화가 개봉할 즈음 20대 중반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이야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원래 향수 마케팅은 격동의 1970년대에 청춘을 보낸 중년의 기억이 주된 양분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20~30대에게도 가능해진 것이다. 굳이 김광석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전람회’만으로도 묻어날 운치가 꽤 쌓인 세월이라는 이야기다. ---「담다 : 마음을 쏟고 마음을 쌓고」중에서
직업은 그 밥벌이로서의 의미를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다 보면,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가지는 것이 마치 부끄러운 일인 양 몰아가게 된다.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마치 패배자인 것처럼 박탈감을 선사한다. 연봉이나 사내 복지 등을 우선하는 구직자들이 제일 싫다는 기업 면접관들의 말은 얼마나 오만한가. 착취와 열정페이는 모두 이렇게 ‘노동으로서의 직업’이 소외될 때 나타난다. 직업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강조되는 것은 삶에서 일이 너무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법이 규정하는 시간만큼 성실하게 일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가치와 즐거움은 여가 시간에 찾아도 된다. 자아는 거기서도 세울 수 있다. ---「속다 : 달콤한 영웅의 덫」중에서
지금도 어머니께 감사하는 것은 풀린 눈 남루한 행색에 술 냄새 진득한 그들을 매정한 말로 내쫓지 않았다는 거다. 내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늘 의자를 내주고, 마실 거리를 내오고, 말동무가 돼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디오가게는 쉼터 같은 분위기가 되어갔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곳이 우리 가게 문 앞이 되는 일도 잦았다. 아침에 학교 가려고 셔터를 올렸을 때 덜컥 놀라던 가슴도 슬슬 익숙해져갔다. ---「만나다 : 웰컴 투 비디오가게」중에서
아주아주 나중에, 아버지가 정말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을 때가 찾아오면 낚시를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한 문장으로 가득한 메일을 잘 갈무리해둬야겠다. 신혼의 세월을 담은 스크랩북을 고이 모셔둬야겠다. 어쩌면 그때엔 내 아이가 곁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갈무리해두었던 그 문장들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 순간은 또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