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는 진도대교를 걸어서 건너 진도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바다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다리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이 보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짭조름한 미역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바닷바람을 흠뻑 맞으면서 걷고 싶었는데 버스는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읍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 말았다. 기왕에 지나왔으니 진도대교 걷기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돌아가는 길에 걸어서 건너면 되니까. 아껴두었다 걸으면 더 좋을 수 있지. --- p.13
의신초등학교 명금분교장. 소란스러운 아이들 목소리에 이끌려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기구에 사내아이가 홀로 올라 앉아 있었다. 아이는 아홉 살이라고 했다. 2학년이고. 쉬는 시간이라 나와서 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 지른 곳에서 아이들 셋이 놀고 있다.
2학년은 전부 세 명이고, 1학년은 한 명, 3학년은 다섯 명, 4학년은 일곱 명이란다. 학교운동장이 휑하니 넓어 보인 건 아이의 대답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1학년이 한 명이라는 아이의 말에 이 학교 역시 머지않아 폐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워졌다.
학교에서 나오다 보니 교문 옆에 국민교육헌장을 새긴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이 표지석,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티가 아주 심하게 난다. 낡고 추레하다. 국민교육헌장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잊히고 말았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 pp.45-46
축제 무대는 진도 쪽은 녹진 무대, 해남 쪽은 우수영 무대다. 우수영 무대와 가까운 해안가에 성벽을 길게 쌓아놓았다. 성벽은 새로 쌓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이 성벽 위에 올라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임이 분명하다. 좋아, 나도 저기서 명량대첩을 보는 거야. 성벽으로 다가가 높이 가늠하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카메라를 성벽 위에 올려놓고, 다음에는 배낭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어 올라갔다. 진도까지 와서 별짓을 다 한다 싶기는 했지만 재미도 있다. 깔판을 꺼내 깔고 앉으니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것이 아주 좋다. 자리를 아주 잘 잡은 것 같다.
명량대첩 재연은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그까짓 거, 했는데 안 봤으면 후회할 뻔 했다. 울돌목은 유속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유속이 빠르니 적조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단다. 명량대첩이야 세계 해전사에서도 길이 남을 만큼 유명한 해전이 아니던가. 유속의 흐름이 빠른 곳에서 당시 전투현장을 재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곽 위에 올라앉아서 깨달았다. 바닷물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해전을 재연하려면 연습을 많이 했겠다, 싶었다. --- pp.86-87
“아줌마, 일어났어?”
어제는 아가씨라고 하더니 내가 결혼도 했고, 나이도 제법 먹었고, 대학생 아들도 있다고 하니 호칭이 아줌마로 격상(?)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노총각 아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음메 아가씬 줄 알았더만 아줌마네, 했다. 나도 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지 않고 아줌마라고 불렀다. 칠순을 넘긴 나이라고 해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줌마, 저 일어났어요.”
할머니는 내가 민박집 손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먼 일가붙이가 하룻밤 신세라도 지러 온 것처럼 하고 있으니, 원.
“벌써, 일어났는가? 얼렁 밥 먹세. 어여 오소.”
할머니는 방문을 닫고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고,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고양이 세수를 한 뒤 부엌으로 갔다. 손바닥만 한 식탁 위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제 저녁에 먹던 멸치볶음, 묵은지, 김치 외에 입이 엄청나게 큰 생선 한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깻잎절임. 할머니는 공기에 밥을 가득 퍼서 식탁 위에 얹어놓았다. 저 밥을 내가 다 못 먹지, 싶어서 압력밥솥에 밥을 덜어냈다. 식탁은 두 사람밖에 앉을 수 없다. --- p.100
저녁을 먹고 씻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았다.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77세. 울 어머니는 올해 73세. 울 어머니보다 네 살밖에 많지 않다. 할머니는 내 나이를 물어보더니 죽은 딸과 나이가 같다고 했다. 다시 나이를 따져보니 할머니의 죽은 딸은 나보다 한 살이 위였다. 그 딸,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살아 있으면 내 또래가 되었을 딸이 생각나셨던 것 같다.
세월을 따져보니 할머니 딸이 죽은 지 2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더니, 할머니의 가슴에는 자식이 묻혀 있는가 보다. 할머니가 가슴에 묻은 자식은 더 있었다. 한스러운 세상, 뒤에 태어난 자식이 없었다면 못 살았을 거라는 말을 담담히 풀어놓는 할머니.
촉수 낮은 형광등이 켜져 있는 방안은 어두웠고, 할머니의 목소리 역시 낮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 할머니가 아니여. 니 엄마여, 엄마. 느이 엄마가 나보다 네 살 들 먹었잖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가 울 어머니보다 한참은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자식을 앞세운 세월이 길었던 탓이리라. 할머니의 손은 나무 등걸처럼 딱딱하고 거칠었다. 마음에 한 자락 바람이 휙 불어오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12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이후 계속해서 혼자 살아오셨단다.
--- pp.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