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켄의 유령」 프랑스 중부 도시 클레르몽페랑에 부임하게 된 기상학자 베르나르 그라몽. 그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도시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의 아내와 불륜에 빠진다. 친구가 출장을 떠난 날, “죄의식과 더불어 괴로운 비밀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 년 반쯤 지난 어느 날 그는 친구를 통해 그의 아내가 새 애인과 다른 도시로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녁이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옛 습관을 이어나간다. 이 년 후 어느 날 저녁, 그의 친구가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며 갑작스레 절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뒤로 문을 닫으며 말한다. “섭섭하게 생각지는 말아줘요.”
「사형수」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죄책감만 더해주는 추억들에 괴로워하는 노인이 있다. 어린 시절 키우던 개가 심장마비로 죽어버린 일도 자신이 개를 혹사시켰기 때문이고, 전쟁중 스페인으로 건너간 유대인 친구가 연락두절이 된 것도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그리고 마흔 살 무렵 불륜 관계에 있었던 애인이 자신의 이별 통보에 혹시 그릇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그는 상념에 잠긴다. 마침내 그는 목을 매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판사이며 동시에 피고였다. 이제 다음 차례의 행동으로 넘어가야 했다. 그는 사형집행관이자 사형수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마음속으로 굴리고 또 굴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마침내 결정적인 것으로 변했다. 법률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상소 불가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막 커피를 준비해놓고 토스터에 빵을 구운 다음 결심했다. 오늘이다. (33쪽)
「마티뇽」 1944년 8월 독일 점령에서 파리가 해방되던 역사적인 그날, 파리의 상점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청년 올리비에 마르키는 레지스탕스 부대를 돕기 위해 프랑스 수상 집무실 겸 관저인 ‘오텔 마티뇽hotel Matignon’으로 찾아오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마티뇽’을 호텔 이름으로 착각해 ‘마티뇽 호텔’을 찾아 파리 시내를 한참 동안 헤매고, 그러다 결국 엉뚱하게도 사창가에 발을 들여서는 총각 딱지를 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오텔 마티뇽이 해방되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짧은 이야기 긴 사연」 같은 동네 유치원 시절에 처음 만나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서로 마주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두 남녀의 일생을, 그 심경을, 그 사연을 우리는 과연 짧은 이야기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또다른 의문이 그의 머리를 스치는 때도 가끔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뜨거운 사랑을, 엇갈린 일이 많았기에 더욱 귀중한 뜨거운 사랑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턱도 없는 환상을 보았던 것일까? 그는 이제 우리가 애정의 측면에서 맛보는 인생의 실패는 사람의 일생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