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깃발]이나 올덴버그의 [햄버거]는 허상의 실체화로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표상하려는 관념으로 응고화한 작품의 좋은 예다. 레오 스타인버그Leo Steinberg의 잘 알려진 언급처럼 ‘거리나 하늘은 캔버스 위에서는 위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깃발, 표적, 7이라는 숫자 등은 그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여기서는 표상하고자 하는 상으로서의 관념과 그것이 대상화된 실체 그 자체로서의 작품이 완전히 자기 동일적인, 즉 관념과 물체의 일체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상으로 다시 보는 작업, 즉 깃발을 물감과 깃발로, 햄버거를 석고와 햄버거로 만드는 일이 성립되었다고 하면 당연히 자기 완결적이기 때문에 보는 자의 시선이 오브제의 윤곽을 넘지 않고, 본 것은 보여진 것, 파악된 것으로 합치된다. 그리하여 자기동일성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p.26~27 중에서
이념과 세계의 동일성 환상은 붕괴해가고 있다. 이미 푸코는 근대의 발명인 ‘인간’의 죽음을, 아도르노는 근대이성 비판으로 비동일성을 언명했다.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풀려난 국가 들이 대등하게 서로를 인정하고자 하듯이, 예술의 영역에서도 캔버스에 자기의 표상으로 회화적인 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만나는 경계적 관계적인 표현이 두드러지고 있다. 즉 내면과 외계의 대화가 가능한 상호적인 장의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표현의 외부성을 더해 상상력을 해방하는 것이다. 수동인 동시에 능동인 양의적 표현으로 산업사회의 관리된 일상성을 찢고 들어가, 신선한 공기를, 인간을 넘어선 무한 감정을, 끊임없이 열린 세계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p.75 중에서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광경과 '만나고' 싶다는 갈망─작가 인 것을 반쯤 그만두기 시작한 인간의 시각에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생생한가. 빈껍데기 같은 것들이 갑자기 생기를 찾고, 사물은 오브제라는 문맥에서 해방되어 ‘풍요롭고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세계’를 이야기하듯 열린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이 같은 지각은 의식을 표상작용으로 치닫게 하지 않고, 직접적인 ‘만남’의 촉매작용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p.113 중에서
예술가는 존재의 문지기를 만나는 자라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시인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술가─작가는 어딘가에 특별히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시적 순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깊고 직접적인 만남의 세계를 지각하고자 하는 자이며, 세계 언어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보통 이상으로 벌어짐에 관심을 가지고 일상에서 보이지 않 는 세계를 지각의 지평에 부각시키고, 만남의 매개 구조를 일으키는 짓거리를 행하는 자를 가리켜 작가라고 부른다. 만나는 자가 짓거리에 있어 관계항적인 구조를 일으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도 만남의 관계를 지속하고 보편화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만남을 지속하는 작업으로서 짓거리이자 구조의 일으킴인 것이다. 지속적으로 보고 싶고, 지속적으로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짓거리로 구조를 일으키는 벌어짐은 보는 방식과 보이는 것의 양식화를 가져온다. 그것이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지속적 현재화의 방식인 것이다.---p.145 중에서
현상학의 정의에 의하면 근대가 파악한 의식의 작용적 특성은, ‘무엇에의 지향성’후설, ‘되돌림 투기성’하이데거, ‘…을 향해 작렬하는 움직임’사르트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 쪽에서 저쪽으로’von sich hin와 ‘저쪽에서 자신에게로 조정하는zu sich her 것’이다. 여기에서는 의식작용이 그대로 표상작용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의식은 작용을행하는 주체와, 여기에 대치되는 대상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진다. 하이데거가 ‘근대 형이상학에서 의식의 본질은 표상작용이다’(『궁핍한 시대의 시인』)라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p.178~179 중에서
절대를 바라면서 파괴와 창조의 절망적 반복을 견뎌내며 비명을 지르는 사상가는 한두 명이 아니다. ‘지향성의 죽음’이나 ‘비인간의 탄생’을 통해 서구의 해체를 시도한 하이데거나 메를로 퐁티, 미셸 푸코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지평을 한눈에 조망하는 사유의 꼭대기에 이른 그들일지라도, 아직 거기에서 비약의 세계를 여는 방법을 제시해주지 는 않는다. 그들이 새롭게 의거하는 존재론의 지반이 불안정하기 때문인지, 여전히 불안과 초조에 가득한 그 표정은 흔들리는 줄다리 같아, 근대인을 한층 곤혹에 빠뜨린다. 그렇다고 해도 하이데거는 언제나 냄새 짙은 '존재'라는 명사 위에 [X]를, 메를로 퐁티는 ‘의식보다 지각의 우선’을, 푸코는 ‘인간은 인간이기를 그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특히 메를로 퐁티는, 의식의 인식론적 지평 그 자체를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인식 이전의 지각 벌판에 서서 인간을 외계와 내부의 접점이라는 신체 존재로 다시 파악해, 지각에 의한 세계와 자기의 관계성 속에서 의식의 움직임을 보고자 한다. 그가 현대철학의 과제를, 인간을 의식 존재─인식 주체로부터 신체 존재─지각관계로 새롭게 보자는 것도, 우선 인간을 외계와 내부의 관계성에 돌리고, 종래 존재론과 결별할 결의를 보여준 것으로 봐야 한다.---p.196 중에서
세계를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직접 경험의 장소로서 자신의 신체가 그곳에서 세계와 일체감이나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때, 의식은 자각 상태를 경험하게 되 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만남의 자각성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있는 그대로가 있는 그대로를 한정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독자적인 긍정의 방식, 즉 세계는 신체의 매개성에 의해 직접 경험의 장소가 되며, 그 지각의 자각성을 통해 인간은 열린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p.216 중에서
이 책 『만남을 찾아서』에는 이우환이 주로 1960년대 말에 쓴 글들이 실려 있다. 쓰인 지 어언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극과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미술계에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글로벌리즘과 하이테크놀로지로 대표되는 정보화 시대에서 미술 표현은 그 현장감이나 신체성을 급속도로 잃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우환이 이 책에서 거론하는 만남, 장소 성, 외부성, 양의성, 재제시 등과 같은 모티프는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p.245 중에서
『만남을 찾아서』는 이우환이 참여하며 당시 일본미술의 주류로 부상한 모노파의 사상적 배경과 전개 과정을 모노파 아티스트 이우환이 직접 해명한 저작이다. 일본의 전후 미술에 서 모노파가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무엇인가를 논하는 글들은 허다하지만, 만족스러운 설명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이우환은 근대의 인간중심적 관념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시각의 일 방성을 반성하고 상호적인 관계의 제시와 타자와의 만남을 제창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위해 장소와 공간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 『만남을 찾아서』에서 독자는 전후 일본미술의 가장 첨예한 시기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침없이 철학과 예술이론을 동원해 모노파 작가들의 작업을 분석하는 젊은 이우환의 사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세키네 노부오론과 다카마쓰 지로론은 사진이나 도판이 한 장도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우환의 생생한 필치를 통해 당시 작가들의 열정적인 제작 과정과 열기에 가득 찬 전시장 풍경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p.24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