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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2000년의 역사

용병 2000년의 역사

: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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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3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416g | 153*224*20mm
ISBN13 9788987162942
ISBN10 89871629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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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기쿠치 요시오 菊池良生
1948년, 이바라키현에서 출생.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메이지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전공은 오스트리아 문학, 주 연구 테마는 독일?오스트리아 문화사이며 특히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다. 유럽 근대, 합스부르크가, 용병제 등의 주제로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영광≫ ≪싸우는 합스부르크가≫ ≪합스부르크를 만든 남자≫ ≪이카로스의 추락≫≪개의 죽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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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 십자군 원정도 끝이 나고, 남아도는 전투 병력은 졸지에 갈 곳을 잃어버렸다. 곧 발발하는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백년전쟁도 1백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싸울 때마다 용병을 모집했다가 다시 해산하기를 반복했다. 실업을 두려워한 용병단은 일을 구하느라 전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물론 가는 곳마다 행패를 부려 촌락과 도시를 짓밟고 다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금맥을 발견했다. 중앙권력의 부재로 도시들이 분열과 항쟁을 거듭하고 있던 14세기의 이탈리아였다. ---p.50


용병대장 호크우드 역시 돈에 대한 집념에서는 누구 못지 않았는데, 영국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평소 좋지 않은 행실로 인해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흘러들어간 후 이탈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두 명의 수도사가 “신이 당신에게 평화를 내리시기를!”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호크우드는 “신이 베푸신 너희들의 양식을 다시 거둬들여 뒈져버리기를! 이 빌어먹을 놈들아, 신이 나에게 평화를 내리면 나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p.60


많은 수의 용병대장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위험시되고, 반대로 전투 운이 나쁘면 곧장 해고되었다. 언뜻 화려하게 보이지만 용병대장들이 서 있는 곳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과 같았다.
그래서 용병대장들은 생각했다. 매사에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즉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용병대의 계약기간은 보통 제1확정기과 제2예정기를 합쳐서 6개월이 일반적이다. 너무 빨리 승부를 내면 제1확정기로 계약이 종료되고 만다. 그래서 서로 맞붙은 용병대장들은 미리 짜고서 싸움을 질질 끈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밀집대형을 짜지 않고 흩어져서 전선에 돌입하는 이탈리아식 공격 방법에 대해 작은 전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라며 통렬히 비난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판 전쟁게임이었다. ---p.66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탕아들이 오로지 흉포한 에너지가 날뛰는 대로 음모, 암살, 배반, 간통을 일삼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었다.
바로 그럴 때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침략해오자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에 빠졌다. 그것은 프랑스 기사군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프랑스군에 섞여 있는 다수의 용병, 특히 보병의 중심을 이루는 스위스 장창---p.長槍부대였다.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힘차게 리듬을 타는 행진 방식, 원시적인 무대뽀 습관, 용맹함과 잔인함이 가득한 전장에서의 외침 소리 등, 스위스 장창부대원들은 세련된 르네상스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 눈에는 말과 행동, 그 무엇 하나도 경악하게 만드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인 것이다. ---p.71


관광이라는 산업이 출현하기 이전의 스위스는 험준한 산들이 우뚝 치솟은 척박한 산악지대에 불과했다. 경작 면적도 극히 좁은 데다가, 어설프고 열악하기 짝이 없는 낙농 경제로 이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남자의 힘이 없어도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는 소규모 생산 형태였다. 산간 지역에서 자란 덕택에 하체가 단련된 강건한 남자들이 일할 곳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돈 벌러 타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당시 대규모의 고용을 보장하는 최대의 산업은 단연 전쟁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스위스의 남자들은 용병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 맘대로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위스 서약동맹의 각주는 소수의 도시귀족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 문벌 주정청은 농민들을 하나로 묶어 스위스 보병을 필요로 하는 유럽 각국의 세력들과 용병 계약을 맺은 것이다. 즉 스위스 용병부대는 국가가 관리하는 용병이었다. 더구나 각 주정청이 힘들게 모집할 필요도 없었다. 일할 데가 없는 건강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용병 모집에 응했고,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야말로 ‘피의 수출’인 것이다. ---p.80


15세기 말~17세기 동안 약 2백년에 걸쳐 유럽의 전장뿐 아니라 신대륙 남미를 포함해 세계 도처에 나타나 사람들을 떨게 한, 군사 역사상 매우 특이한 군사 조직인 란츠크네흐트.
당시 사회는 태어나서 마을 교회의 첨탑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의 정착형 농촌 사회였다. 하지만 당시의 남독일은 정착사회에서는 무법자를 의미하는 뜨내기나 방랑자가 될 사람들을 대량으로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농가의 차남이나 삼남과 도시 난민이 정착사회에 등을 돌리고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모두 용병 모집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간 데가 지옥이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어쨌든 남독일은 용병의 보고(寶庫)였고, 이들 남독일 출신 보병으로 이루어진 용병을 일컬어 란츠크네흐트라고 한다. ---p.94


“란츠크네흐트는 복장과 무기 면에서 스위스 용병부대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다채로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그 복장은 괴이하기까지 했다.
소수의 기사군에서 대규모의 보병군 시대로 접어든 중세 말기, 군주의 국가 독점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군주에게는 돈이 없었고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용병을 고용했다. 그런 용병에게 제복을 주는 것은 돈을 시궁창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대에 제복이 도입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용병들은 각자 모두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누덕누덕 기운 초라한 옷차림을 한 자가 있는가 하면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은 자는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을 했다.
란츠크네흐트 용병 세계로 뛰어든 자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살 길이 막막해 정착사회를 등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들러붙어 겨우겨우 먹고 사는 겁쟁이들을 향해 자유가 없다며 비웃었다. 그리고 마을과 도시를 떠나 얻은 ‘자유’를 매우 특이한 옷차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p.100

란츠크네흐트는 군 당국으로부터 관리 통제를 받지 않는 자신들만의 자치 조직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병사 집회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기능을 하며 급료의 미지급에 대한 항의, ‘돌격 수당’ 같은 특별 수당의 획득, 약탈품의 공동 분배 등, 공동 결정권을 행사하며 군 당국의 온갖 부정행위를 감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란츠크네흐트 부대는 군 역사상 보기 드물게 민주적인 군대였다. ---p.106


그럼 이처럼 특수한 군대인 란츠크네흐트 부대를 이끄는 연대장, 즉 전쟁기업가인 용병대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병사들에게 있어서 연대장은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기업가였지만 그렇다 해도 연대장이 있고 나서야 병사들이 있는 것이다. 부대 내에서의 재판권, 전투 중의 작전지휘 등, 연대장은 그야말로 병사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병사들 입장에서 봐도 급료를 지급하고 자신들을 먹여살려주는 것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제후, 제국 각 도시, 프랑스 왕, 스페인 왕, 영국 왕, 로마교황, 이탈리아 각 도시의 누구도 아니고 바로 연대장이다. 병사들은 연대장의 고용주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이 어느 나라의 군주건, 적이 누구건, 누구를 위한 전쟁이건 전혀 관심 없었다. 오로지 어느 연대장을 따라가야 급료를 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고, 많은 약탈품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p.110

보헤미아의 소귀족 출신으로 보헤미아 반란 때 발빠르게 황제 측에 붙어 두각을 나타낸 자가 알프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 1583~1634)이었다. 발렌슈타인은 5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겠다고 자청했다. 이는 도저히 일개 용병대장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황제군 총사령관이 되자 자신의 역량으로 15만 명의 군사를 편제했다. 대체 그럴 만한 돈이 어디서 났을까?
그의 뒤에는 민간 투자가가 있었다.
민간 투자가들은 어떻게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것일까? 자금을 회수할 전망은 있었던 것일까? 발렌슈타인은 “전쟁은 전쟁에서 영양을 섭취한다”라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자금회수 방법을 발견했다. 즉 만스펠트 군이 벌이는 일상적인 약탈보다 그 몇 배 규모로 약탈을 실행하는 것이다. ---p.164


일본에서는 1615년 오사카의 진(大坂の陣),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가문을 공격하여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전투 여름 전투가 끝나고, 천하태평 시대의 막이 열렸다. 그것은 곧, 150년 동안 이어진 전국시대의 거대한 전쟁 에너지가 한순간에 갈 곳을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 거대한 에너지는 동남아시아를 향해 분출되었다. 이 무렵은 일본인 용병이 대량으로 바다를 건너 해외로 진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징후는 히데요시에 의한 임진왜란 직후부터 나타났다. 약 10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으로 건너갔고, 그리고 돌아온 병사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렇다면 돈에 굶주린 병사들이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스페인의 마닐라 총독은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에게 일본인 용병의 위험성을 보고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같은 동양무역의 선두주자와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주자가 격돌하고 있던 전장이었다. 양측 모두 용맹을 떨치고 있는 일본인 용병을 몹시 원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 곳곳을 휩쓸고 다녔다. ---p.180


루이 14세는 스위스 용병을 특히 총애했는데, 그가 어린 시절 연못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스위스 호위병이 구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스위스인 근위대가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튀를리 궁전으로 밀어닥친 민중들을 맞아 최후의 한 명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것만 봐도, 스위스 용병부대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루이 14세 때 스위스 인구는 약 90만 명이었고, 그 중 12만 명이 프랑스군을 위해 일했다. 따라서 스위스 병사는 프랑스의 단순한 용병이라기보다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급료를 받는 동맹자나 다름없었다.
사실 스위스 서약동맹은 프랑스와 동맹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평시에도 최소한 12중대 2천4백 명의 연대를 프랑스에 제공해야 했다. 이들이 바로 1688년에 설립된, 붉은 코트의 제복으로 유명한 스위스 연대이다. ---p.184


1792년 8월 10일, 급기야 프랑스 혁명세력은 이 계략에 넘어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민중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은 왕이 사는 튈르리 궁전으로 돌격했다. 왕을 지키려는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입법의회는 루이 16세의 왕권을 정지하고 새로이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이때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병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멸했다. 그리고 열흘 후 프랑스에 상주하던 스위스연대 4만 명의 병사가 해고되었다. 약 3백 년에 걸쳐 프랑스군의 중추를 담당한 스위스 용병부대가 프랑스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전선은 기병과 보병 모두 전진하기도 힘든 격렬한 포격전이 되었고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포격을 배로 늘려 보병과 기병을 돌입시키려고 했다.
그때 혁명군 속에서 갑작스레 “프랑스 국민 만세!”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프랑스 국왕 만세!”가 아니라 틀림없이 “프랑스 국민 만세!”였다.
외침소리는 순식간에 프랑스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때 처음으로 ‘조국 아니면 죽음’을 의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이 탄생했다. 즉 이때부터 프랑스의 전쟁은 왕가에 의한 왕조전쟁이 아닌 국민전쟁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용병부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p.218


1831년 3월 10일,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Louis hilippe), 재위 1830~1848은 외인부대 창설에 관한 칙서를 공표했다. 한해 전 7월혁명(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루이 필리프 시대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였다. 유럽 각국에서 내란이 일어나 망명객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사회는 불안했고 알제리에서는 식민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의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때 벨기에의 모험가이며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라크로와’라는 인물이 국왕에게 기발한 제안을 했다. 바로 골치아픈 망명객, 도피자들, 부랑자들 그리고 군대가 해체되어 불만에 차 있던 군인들을 모아 ‘외인부대’를 만들어 알제리로 보내 싸우게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부대의 당초 목적은 당시 프랑스가 손에 넣은 식민지 알제리의 점령 정책을 위해서였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외인부대 병사들은 병사인 동시에 도로 공사장의 인부이기도 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격심한 추위 속에서 병사들은 전투가 없을 때는 카빈총을 옆에 두고 도로 공사에 종사했다. 프랑스 정규군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인부대를 지휘하며 주로 알제리 전선에서 싸웠던 프랑스인 장군들은 ‘아프리카 촌놈’이라고 멸시당하며 군의 핵심에서 늘 밀려났다. ---p.225


어쨌든 프랑스 외인부대를 제외하고 고대오리엔트 이래로 유럽의 가장 기본적인 군사제도의 하나였던 용병제도는 국민군의 탄생과 함께 유럽 국가들의 군사기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용병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전쟁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갈 길이라는 여기는 모험가가 되고 싶어한다. 또는 군사컨설턴트 회사들에게 자신들을 팔아넘긴다. 민간 군사기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즈(Executive Outcomes)이다.
현대의 용병들은 예전처럼 먹고살기 위해서만 용병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굳이 사지로 향하는 것은 자신들 몸에 깃들어 있는 모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전장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한 곳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서글픈 인간들인 것이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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