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권 지표의 생산적 활용을 위해
세 가지 글로벌 인권 지표는 상호 배타적이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고, 이러한 여러 지표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각국의 인권 관행이 평가될 때 인권 상황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총제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 인권은 다양한 층위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차원들 간에는 이론적?경험적 분석을 요하는 복합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글로벌 인권 지표들 역시 다양한 층위를 측정하는 복수적 측정도구가 그간 주목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다양한 지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인권을 평가할 때 비로소 인권에 대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 이렇듯 다양한 인권 지표를 통해 주요 사례의 인권 추이를 살펴보고, 이러한 변동을 촉발한 요인을 찾아보는 작업은 그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그간 글로벌 인권 분석 혹은 인권 개선조건 분석에서는 거의 대부분 PTS를 그 주요 종속변인으로 활용해왔고, 이로 말미암아 보다 광범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차원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의 차원을 분석의 사각지대에 위치시킨 경향이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미국의 대학과 연구소에 연계되어 있고, 따라서 인권을 개인통합권리를 중심으로 파악해온 미국식 편견을 재생산한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pp.63-64
글로벌 인권 개선의 조건
글로벌 인권의 개선과 후퇴의 역사적인 패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글로벌 인권 연구의 중요한 과업의 하나라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작업은 이러한 전 세계적(혹은 지역적) 인권 관행의 차이를 낳은 요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인권이 후퇴하였다면 왜, 어떤 요인에 의해 인권의 억압이 이루어진 것인지, 그리고 인권이 개선되었다면 무엇이 이러한 인권 관행의 진보를 촉발시킨 것인지에 대한 엄정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권 개선(혹은 후퇴)의 조건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이루어질 때라야 비로소 글로벌 인권의 개선을 유도하는 신뢰할 만한 공공정책의 개발이 가능해진다. ---pp.84
글로벌 인권 지표를 통해 바라 본 한국의 인권 추이
글로벌 인권 지표를 통해 바라본 한국 인권은 지난 30여 년 동안 역동적인 진화를 경험했으나, 크게 보아서는 인권의 개선 쪽으로 움직여온 것으로 분석된다. 인권 지표가 공시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군사정권하에서 선성장 후분배 정책과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작동 속에서 인권은 극도로 억압되었고, 이에 따라 인권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었다. 고문과 은밀한 죽음이 비일비재했고, 집회?결사의 자유와 노동기본권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1987년 민주화대투쟁과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면서 기본적인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하였다.
Freedom House의 자유지수는 한국의 시민적?정치적 권리 지수가 1988년에 접어들어 대폭 상승하였음을 논증하고 있다. 1980년대를 통해 초고속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의 보장을 위한 물적 토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개발지수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괄목할 만한 인권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개인통합권리를 측정하는 여러 글로벌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국제사회적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개인통합권리의 보장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고문과 정치적 구금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대’, 전두환의 ‘정의로운 사회 시대’, 노태우의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지만,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대’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시대’에도 은밀히 이루어졌다. 즉, 신체권의 억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가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CIRI 지표를 위시한 글로벌 인권 지표에 잘 반영되어 있다. ---pp.110-112
일본의 뿌리 깊은 차별, 부락민과 재일한국인 집단
일본의 진보적 세력이 패전 직후 미군정의 개혁 드라이브와 함께 잠시 목소리를 높였으나, 곧이어 이루어진 보수화와 궤를 같이하면서 급격히 약화되는 동안, 인권 관념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를 몇몇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신분 차별 문제인 부락민 차별 문제와 단일민족으로 알려진 일본 사회에 숨겨진 소수민족인 재일한국인 집단 문제가 그것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인권 문제는 부락민 문제와 동일시될 정도로 부락민 문제는 일본 사회의 깊은 상흔과 같다. 1871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부락해방령이 이루어졌으나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여, 1922년부터 부락민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 투쟁해왔다. … 부락민의 상황은 1969년 일본 정부가 ‘동화대책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 속에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 부락민 문제가 일본 사회의 숨기고 싶은 상흔이라고 한다면, 재일한국인은 드러내놓고 차별할 수 있는 외국인 집단이다. 일제시기에 노동을 위해서 이주하거나 강제연행당했다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정주하게 된 한국인들은 해방 후 극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여러 인권 개념을 포함한 일본의 신헌법도 제외시켜버린 외국인, 재일한국인 집단의 국적 문제와 민족교육을 위한 투쟁은 그 대표적 경우다.
---pp.237-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