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도기 제작의 본격적인 기원은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300년경~기원후 300년경)에 있다. 이는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야요이 토기는 그 고유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의 미학전통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도기제작술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토기로부터 세련된 자기로 이행되면서 초창기의 도기들은 그저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왔다. 심지어 그들이 주로 중국의 영향 아래 더욱 세련된 도기를 만들 수 있게 된 때조차 그러했다. 우리는 원시적 도기에 대한 이와 같은 애정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를 일본 중세에 발전한 다도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p.26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일본의 돌정원은 교토(京都) 료안지(龍安寺)의 가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일 것이다. 그것은 15개의 돌을 단독 혹은 복수로 배치하고 장방형의 평평한 바닥은 세심하게 써레질한 흰모래로 덮음으로써 명백히 대양 한가운데 우뚝 튀어나온 섬들을 표상하고 있다. 이처럼 대양 속의 섬을 표상하는 기법은 역사적으로 초기 정원양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령 헤이안(平安) 시대의 신덴즈쿠리(寢殿造) 저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못과 섬도 이런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오직 돌과 모래로만 구성되어 있는 료안지 정원은 그 철저하고 엄격한 배치로 보건대, 가히 춥고 시들고 쓸쓸한 것을 중시한 중세 미학의 궁극적인 시각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예술로서 흰 종이 위에 검은 먹물로 표현한 서예 두루마리 혹은 먹물을 번지게 해서 묘사한 수묵화에 비유될 만하다. ---p.227
센노 리큐(千利休, 1521~1591)는 자노유(茶の湯, tea ceremony)를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인물로 유명하다. 이미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1423~1502)도 자노유는 다타미 네 장 반 정도 크기의 작은 방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다기용품과 실내장식은 최소한도로 해야 한다고 시사한 바 있다. 후대의 와비차(侘茶) 대가들은 자신의 다실을 가장 하찮은 농부들의 움집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생나무와 진흙벽으로 오두막을 짓고 도코노마(床の間)에 놓는 한 송이 꽃 혹은 족자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장식을 피했다. 하지만 리큐는 거기서 더 나아가 기껏해야 한 번에 두세 사람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다타미 두 장 반 크기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오두막집을 자신의 다실로 선호함으로써 와비차의 궁극적인 경지를 성취했다. ---p.262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797~1858)는 교토(京都)와 에도(江戶)를 잇는 대로변 풍경을 묘사한 「도카이도고주산지」(東海道五十三次)라는 일련의 판화 작품으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다. 일본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이 도카이도(東海道)는, 도쿠가와 시대에 에도를 오가는 장대한 다이묘 행렬뿐만 아니라, 상인들, 편력승려들, 순례자들, 광대들, 모험가들, 심지어 쇼군(將軍)을 알현하러 에도를 방문하는 네덜란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길이었다. 이처럼 혼잡했던 도카이도 도로변마다 역참들이 번성했으며, 곳곳의 여관, 주막집, 사창가, 공중목욕탕 등을 방문한 유명인사들 및 특별한 사건들에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과 설화들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도카이도는 작가와 화가들에게 매우 비옥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p.363
1927년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자살은 당시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는 오랫동안 여러 가지 육체적 질병을 앓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분열증적인 우울증과 발작으로 고통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심사숙고하면서 차분하게 자살을 준비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아쿠타가와의 지적, 감정적 절망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었으리라는 점을 느끼게 해주었다. 유서에서 아쿠타가와는 ‘막연한 불안감’을 언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자살을 한편으로는 더 큰 사회적 맥락에서(가령 다이쇼 및 초기 쇼와 시대 일본사회의 도덕적 공허감 내지 결핍에 대한 저항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근대 일본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창조성의 지독하게 부정적인 측면에 따른 불가피한 최종결과로 해석하고 싶어 했다. 만일 우리가 후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아쿠타가와는 전후(戰後)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든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감행한 자살의 모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461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는 그저 단순한 전쟁영화를 훨씬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장 유서 깊은 일본 고유의 전통 안에서 특히 계절의 변화를 통해 경험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그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한한 속성에 대한 일본인의 영원한 감수성을 시각적으로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잘 드러내 보여준 탁월한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감수성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즉 산적들을 다 물리친 후, 마을 사람들은 다시 농사일에 신경을 써야만 하고, 살아남은 무사들은 죽은 동료들의 무덤에 잠시 경의를 표하자마자 다시금 길을 떠나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회적 불안정성 및 방향성과 의미가 부재하는 삶을 뜻하는 로닌의 신분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pp.507~508
전후(戰後) 만화가 가장 즐겨 다룬 주제 가운데 하나는 공상과학소설(SF)류의 이야기이다. 그 밖에 남성적 에토스라는 면에서 미국의 카우보이물에 해당할 만한 사무라이물도 많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인기를 끈 ‘전쟁만화’류는 일본에서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2차대전 중에도 예컨대 적을 도살하는 거친 사나이다운 남자로서 일본군을 묘사한 만화나 영화는 없었다. 그보다는 전쟁터에서 맺어진 군인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라든가 혹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일본군들의 단순하고도 순전한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전후의 일본 만화가들은 전쟁을 예찬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반대로 혹자는 반전만화를 그렸고, 또 혹자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일본에서 시민들이 겪은 슬픈 곤궁을 묘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가령 나카자와 게이지(中澤啓治)의 『맨발의 겐』(裸足のゲン, 하다시노겐)은 최초의 원폭이 투하된 날 히로시마에 살던 겐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p.549
요시모토 바나나(よしもとばなな, 1964~ )의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일본의 전통’으로 여겨져온 것들, 예컨대 견고한 사회조직망(핵가족과 함께 시작된 구조)이라든가 강력한 직업윤리 혹은 확고한 기성관습과 제도 등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해 요시모토의 소설들은 사회조직이라든가 직업윤리 혹은 제도나 관습 등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의미 있는 가족적 유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저 피상적으로 급조된 가족이나 문제 있는 가족의 일원으로 묘사되며, 직업에 대한 동기부여가 거의 혹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정해진 방향 없이 인생이라는 바다 위를 부유하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종종 사랑을 갈망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 채 절망적이고 외로운 인생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죽음 또한 요시모토 문학의 지속적인 주제이다. 등장인물들은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구의 죽음(때로는 난폭한 죽음)에 의해 홀로 남겨진다. 가령 『키친』의 주인공 미카게가 엄마처럼 생각했던 사람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장면에서, 우리는 죽음과 운명이 어떻게 그녀를 다루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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