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역사연구에 몰두하면서, ?때로는 그 대상이 거짓된 것이기도 한?진실한 이야기들의 흔적을 찾아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에조차 이러한 정의의 그 어떤 용어들(‘이야기하기’, ‘흔적들’, ‘이야기들’, ‘진실한’, ‘거짓된’)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말을 하며, 시인은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가능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썼다. 하지만 물론 진실한 것은 도착점일 뿐, 출발점이 아니다. 역사가들은(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시인들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일부에 해당하는 그 무엇, 즉 진실한 것, 거짓된 것,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줄거리인 조작된 것의 매듭을 풀어가는 것을 직업으로 한다. ---본문 중에서
실과 흔적들 간의 관계
그리스인들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로부터 실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테세우스는 이 실을 가지고 미로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찾아내 살해하였다. 하지만 신화는 테세우스가 미로를 돌아다니면서 남긴 흔적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모든 장章들의 내용은 이야기의 실마리로서 우리를 현실의 미로로 인도해주는 실과 흔적들 간의 관계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역사연구에 몰두하면서, ?때로는 그 대상이 거짓된 것이기도 한?진실한 이야기들의 흔적을 찾아 기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에조차 이러한 정의의 그 어떤 용어들(‘이야기하기’, ‘흔적들’, ‘이야기들’, ‘진실한’, ‘거짓된’)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p.7
호메로스와 『호수의 랑슬로』
샤플랭은 자신이 『호수의 랑슬로』에서 어떻게 프랑스어가 초기의 촌스런 상태에서 오늘날의 세련된 언어로 발전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어휘와 표현들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메나주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플랭이 『호수의 랑슬로』를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였을 때, 메나주는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였다: “당신은 무식하고 심지어 한심한 사람들조차도 외면하는 그 끔찍한 흉물을 그토록 칭송하는 겁니까? 도대체 당신은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이 저자에게서 호메로스나 리비우스에 비교될 수 있는 인간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는 물론, 수사학적인 질문이었다. 샤플랭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문학가의 관점에서 호메로스와 『호수의 랑슬로』의 저자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 전자가 귀족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물이었다면 후자는 저속하고 저급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유사하였다. 즉, 두 인물 모두 허구적인 이야기(fables)에 집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의 산문들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호수의 랑슬로』에 대해서도 지지를 표명하였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호수의 랑슬로』에서 마술이 이용되고 있는 것은 호메로스의 시에서 신들이 개입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p.51
볼테르의 런던 증권거래소
뉴욕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WTC)가 붕괴된 지 수일이 지난 후에 다시 문을 연 뉴욕의 증권거래소는 (아드리아노 소프리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 대한 볼테르의 글이 놀라운 현실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금융시장의 합리성과 지구적 차원의 확산은 다양한 종교적 원리주의의 분파적 광신주의에 대치되는 것이었다. 즉 이 대응은 볼테르라면 열렬히 환영하였을 것이다.
아우에르바흐의 반응은 물론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멀리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였다. 목전에서 목격되는 수많은 피의 사건들에서, 그는 모든 종류의 발작과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를 통해 세계 전체에 퍼지게 될 고통스런 여정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의 눈에 (그 자신이 희생자였던) 비관용과 관용은 상반된 길을 거치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아우에르바흐는 우주적인 시각에서,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를 감소시켜 버린다면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인류의 적응능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의 불안감에도 동감하였을지 모른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한 장章인 ‘클레이드와 클론(Cladi e cloni)’에서 이러한 불안감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후 20년이 지났으며, 그 사이에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다.---pp.102-103
스탕달과 발자크
하지만 아우에르바흐에 따르면, 스탕달의 ‘진지하고’, ‘근대적인’ 사실주의는 전적으로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스탕달이 사건들을 직시하는 사고방식과 기회를 이용해 사건들을 재생산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은 역사주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 사건들에 대한 그의 대표성은 역사적인 저력의 직감이나 연구가 아니라, 고전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심리학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의 분석’에서 전개된다.” 스탕달에게서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이며 감성적이지만, 낭만적이거나 역사주의적이지는 않은 동기들이 발견된다.
아우에르바흐는 우리가 진정한 역사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발자크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발자크에게서는 한 시대의 수많은 문화적 형태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미일관성(언행일치)에 모아졌다는 낭만주의적인 이념의 진실과 더불어, 소설가와 역사가의 모습이 드러난다: “환경적 역사주의와 환경적 사실주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미슐레와 발자크는 동일한 흐름을 탄다. [……] 이러한 발자크의 개념과 관습은 모두 역사주의적인 것이다.”---p.107
스탕달의 『적과 흑』, 그리고 신랄한 진실
『적과 흑』을 구성하는 두 권의 각 시작 부분에 언급된 비문들은 다음의 몇 개 문장을 조명한다. 첫 번째 비문은 당통(Danton)의 것이다: “진실, 신랄한 진실.” 두 번째 비문은 생트 뵈브(Sainte-Beuve)의 것이다: “(진실은) 사랑스럽지도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스탕달은 ‘진실’은 다른 무엇보다, 그 어떤 꾸민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이 사랑스럽지 않다고 선언한다: 즉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신랄하다. 신랄한 연대기, 즉 소설(1831)의 첫 판본의 앞면에 붙여진 부제는 ‘19세기의 연대기’였지만, 불과 몇 페이지가 넘어가기 이전에 ‘1830년의 연대기’로 바뀌었다. 종종 최근의 판본들에서는 두 부제들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어떤 독자도 ‘연대기’라는 용어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적과 흑』은 항상 소설처럼 읽혔다. 하지만 스탕달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는 인물들과 조작된 사건들에 근거한 이야기를 통해, 보다 심오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지난 19세기 초반 다른 소설가들에 의해 공감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보들레르가 정의한 바와 같이, ‘위대한 역사가’인 발자크가 그러했다. 하지만 스탕달은 다른 반대의견을 가지고 다른 길을 추구하였다.---pp.109-110
방관자의 눈빛, 사진기
크라카우어는 이방인, 주변적인 존재, “가족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은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야말로, 방관자의 거리를 둔 누빛으로 확고한 인식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투키디데스에서 네이미어에 이르는 위대한 역사가들이 망명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오직 이러한 자기 무화(自己無化, autoannullamento)의 상태에서 또는 조국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역사가는 자신의 연구에 관련한 자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 자료들에 드러난 세계에서 이방인은 내부로부터 이러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배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관통할?망명자의 전형적인?임무에 직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무슨 이유로 크라카우어가 역사에 관한 미완성의 저술을 『영화이론』에서 공식화된 논제들이 발전된 것으로 소개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가와 망명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사진에까지 확대된 성찰의 도착점이다.---pp.139-140
미시사
이탈리아의 미시사 연구는 비교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의 방식으로, 즉 유사함이 아니라 비정상을 통해서 다루었다. (이탈리아의 미시사 연구는) 가장 그럴듯하지 않은 문서들을 가장 강력하고 풍부한 것으로 가정하는데, 이는 한 유명한 토론에서 에도아르도 그렌디가 말한 ‘예외적인 정상’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를 들어 조반니 레비와 시모나 체루티가 했던 것처럼, 모든 사회적 구조가 수많은 사적인 전략들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 즉 오직 근접된 관찰을 통해서만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시적 관찰의 차원과 보다 방대한 맥락적인 차원의 관계가 (상당히 다른) 양자 모두에 있어 이야기의 서술을 조직하는 원리에 해당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미 크라카우어가 언급하였듯이, 미시적인 환경에서 얻어진 결과들은 자동으로 거시적인 환경으로 옮겨질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막 우리가 함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러한 이질성이야말로 미시사 연구에 있어 최대의 어려움임과 동시에 최대의 풍요로움을 구성한다.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