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준 그건 아주 간단해. 이 일을 하면 우선 내가 행복하거든. 그리고 내가 조금 도움을 주는
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도 아마 조금은 행복할거야. 그러면, 저 위에서 세상을 보고 계시는 그분께서도 행복해 하시지 않겠어?'
--- p.39
제 안에는 제가 생각해도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하여간 저는 사람 만나기를 참 좋아합니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다 보니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리저리 세상 떠돌기를 또한 좋아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만남 친구들의 이야기 입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친구들의 이야기 입니다.어쩌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가끔씩 운명 또는 인연의 도움으로 다시 만나기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 입니다.
--- p.머리말
어린 시절 여름방학 한달 동안 진도의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논두렁을 가로질러 가다가 언덕을 넘으면 갑자기 눈앞을 가득 채우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마을의 꼬마들과 함께 발가벗고 헤엄을 치던 제 유년의 바다였습니다. 제 유년의 바다로 안또니오를 데리고 갔습니다. 12월의 바다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안또니오는 그 바다에서 자신의 유년의 바다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서로 절대로 웃어주지 못하면서도 매일 살을 부딪치며 스쳐가야 하는 지하철의 저 무수한 동행자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사람이 없는 곳에 가야 행복해집니다. 사람이 사람 없는 곳에 갈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안또니오와 저는 아무도 없는 진도의 겨울 바다에서 참 행복했습니다. 저의 5촌 당숙께선 조카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난생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그냥 말을 놓으셨습니다.
안또니오는 그래서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작은 할머니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래 신부님 친구는 장가를 들었는가?'
'할머니, 신부님은 결혼을 못하셔요.'
'장가를 못간다고? 그것 참, 세상에 몹쓸 일이로 구나.'
--- p.120
안또니오와의 여행은 제게는 일종의 고해성사이기도 했습니다. 안또니오는 참 '큰 귀'를 가진 친구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얘기죠. 부끄러운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을 때, 가슴이 후련하면서도 대개는 후회가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안또니오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그런 후회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제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던 이야기들이 밀물처럼 안또니오에게로 몰려들갔습니다. 안또니오는 바닷가의 바위처럼 그 많은 제 이야기의 파도를 고스란히 다 받아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안또니오는.
안또니오 : 내 친구의 수도원은 어디인가?
--- p.123
비쁠로는 지독한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수없이 칼리가트를 드나들며 어떻게 하면 '어리숙한' 자원봉사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지를 훤히 꿰고 있는 '왕고참 환자'였습니다. 툭하면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렸고, 그러면 물정 모르는 신참 봉사자들은 열심히 우유와 '무리(쌀 뻥튀기)'를 날라다 주었지요. 어느 날, 비쁠로의 베개를 들춰 보았더니, 세상에! 비스킷이 한 무더기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
'비쁠로, 이 밥 먹을 거야, 안먹을 거야? 안먹겠다구? 그럼 오늘 저녁은 없어! 먹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해! 그리구 이 비스킷은 다 압수야!'...
그러던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환자들의 저녁 시간이 끝나고 오후 일과를 마치기 전, 마지막 점검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비쁠로가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 비쁠로의 목에는 주렁주렁 목걸이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주로 자원봉사자들이 선물해 준 목걸이들이었습니다. 은빛 나는 십자가 목걸이도 있고, 마더 테레사께서 자원봉사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은빛의 성모 마리아 메달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구리로 된 얇은 십자가 목걸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같은 비쁠로는 그 구리 십자가 목걸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그러더니 구리 십자가 목걸이를 제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초라한 검은 색 끈에 달린 십자가였습니다. 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비쁠로에게 인사했습니다.
'내일 보자! 이 말썽꾸러기!'
비쁠로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오후 칼리가트에 돌아갔을 때 출입구를 지키는 인도인 문지기 아저씨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쁠로, 갔어요.'
... 그러면서 하늘로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 pp.82-84
몸이 캘커타를 완전히 떠났음을 알았을 때, 테이프를 다시 처음으로 돌렸습니다. 로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프랑스어 엑센트가 섞인 목소리로 로르는 말했습니다. 그 중에 한 마디만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You know I love you.'
--- p.26